316년 중국의 통일왕조였던 西晉이 異民族에 의해 멸망하자 중국은 본격적인 분열기로 접어들었다. 291년 八王의 亂시기부터 서진과의 교류가 단절되었던 백제는 되도록 빨리 對中교역망을 복구하고자 하였는데, 그 결과 서진의 망명왕조인 東晉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당시는 조공책봉에 의한 중원중심의 질서유지체제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다. 동진은 비록 정통왕조임을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중원을 두고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벌였던 국가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조공책봉이라는 원칙보다는 실리에 부합하는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에 백제 왕실은 굳이 동진의 황실을 거치지 않고 도요지인 양주의 세력가로부터 직접 동진제 도자류를 공급받을 수 있는 교역 루트를 확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4세기 초중반으로 편년되는 동진제 도자류가 백제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음에도 사료상으로 양국간의 교류사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교역루트가 성립된 시기는 동진이 내부의 안정을 어느 정도 가다듬게 되는 329년 이후 무렵으로 추정해 보았다.
이러한 도자 교역은 372년 동진과 백제의 공식적인 외교관계 수립 이후 일정한 변화를 겪은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동진제 유물은 4세기 초까지는 일부 청자류와 전문도기를 중심으로 출토되다가 4세기 중반을 획기로 동진제 정자뿐만 아니라, 백자, 흑자, 계수호 등 정제되고 다양한 기종의 것은 중앙과 지방의 고분에 부장품으로 다수가 매납되는 변화를 보여준다. 이것은 4세기 중엽을 획기로 백제-동진간의 정치적 교섭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도자 교역의 성격변화는 4세기 중엽 당시 동진이 처한 정세변화와도 맞물리고 있다. 먼저 그 동안 동진의 최대 위협세력이었던 後趙가 前秦에게 351년 멸망하였다. 그리고 前涼 이외의 다른 異民族 국가들이 정리되면서 前秦과 前燕, 양국이 패권을 다투는 형세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아래 전진과 전연은 이전 시기와 달리 352년부터 각각 황제를 칭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이들은 동진으로부터 관직을 책봉받는 국가들이었는데 이 시기에 들어 더 이상 동진의 관작에 연연할 필요성이 없어졌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로써 동진은 이민족에게 ‘책봉을 내려주는’ 위치를 상실하여 이민족 국가에 대한 이념적 우위를 상실하였다.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전진, 전연 양국의 군사적 압력에 맞서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백제로 보내는 도자류의 다변화는 이러한 동진의 정세 속에서 교류대상국으로서의 백제의 위치가 한층 중요해진 반증이 아닐까 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