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영산강유역 토기의 변천
Ⅲ. 토기를 통해 본 백제와의 관계
1. 영산강유역에서 보이는 백제(계) 토기
2. 백제 중심지역에서 보이는 영산강유역(계) 토기
Ⅳ. 맺음말
요약
영산강유역에서 범마한양식이 유행하던 단계에도 한성백제양식의 토기가 일부 확인되고 있으나 그것은 영역 확대에 의한 토기제작기술과 문화의 전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낙랑으로부터 가야에 이르는 해로를 이용해 철기 등을 교류하는 과정에 백제 중앙과 관련된 집단에 의해 일부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다.
영산강유역에 횡혈식석실분이 도입되는 단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백제계 토기가 부장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일부 백제 요소가 반영되거나 여러 형식 중 하나로 백제계 토기가 등장한다. 백제계 토기라도 현지세력이 주도하여 생산·분배하였다. 이후 삼족토기 등 전형적인 백제 기종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기대 등과 어울려 나타난다. 그런데 백제계 토기는 지역에 따라 출토 빈도가 다르고 지역색도 보인다. 이것은 백제와의 관계가 영산강유역 전체적으로 일률적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고총 단계의 백제양식토기는 영산강유역양식의 유행이라는 틀을 깨지는 못하고 다양한 외래 토기의 하나로 도입되었다. 한편 영산강 상류지역에 보이는 백제계 토기는 왕권 중심지역보다 금강유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호남 서남부지역집단이 한성백제의 왕권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교섭한 흔적은 토기로 보는 한 아직 분명하지 않다. 웅진기 이후에 일부 보이기 시작하는데 왕권 주변에 거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는 백제왕권의 일방적인 필요에 의해서만 영산강유역에 백제토기가 등장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식 석실이 본격화된 6세기 중엽 이후에는 영산강유역양식 토기는 사라지고 사비기 백제토기가 유행한다. 이때도 나주 복암리집단은 대부완과 같은 사비기의 고급 기종을 사용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위상이 여전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