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II. 전통적 상징체계의 형성
1. 동아세아지역의 보요관 전개양상
2. 백제의 조우형 보요관 출현
III. 신성과 절대권위의 상징체계 형성
1. 백제의 운용문 수용양상
2. 용문 관의 전개양상
3. 운기문 관의 전개양상
IV. 불교적 상징체계로의 전환
1. 연화문 관의 출현과 전개
2. 연화당초문 관의 전개양상
3. 연화당초문 은화관의 전개양상
V. 나가며
요약
이 글은 장식과 문양의 변화를 통해 백제 관의 상징체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 본 것이다. 백제에서 관의 존재를 살필 수 있는 것은 석촌동 고분군 출토 금제보요이며, 이 보요는 관에 달렸던 장식물로 추정된다. 보요가 달린 관의 기원은 아프카니스탄 틸리야테페(Tillya-tepe)에서 출토된 여왕의 금관(기원전후)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모용선비족의 관, 고구려의 조우관 등으로 이어지고 백제에서도 관 장식으로 채용되었다.
백제의 관 형태는 弁형 내관(관모)과 입식을 세운 외관을 지닌 것으로 사료된다. 입식은 조우형에 보요가 달린 형태로 추정되는데, 이 들은 “수목”과 “새”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금제 보요관의 출현은 왕과 다른 유력자들을 차별화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역사적 배경-예를들어 고이왕대-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며, 늦어도 4세기 중반 이전으로 본다.
4세기 말 수촌리 1호분 금동관에서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용문양이 주문양으로 등장하여 수촌리 4호분 금관으로 이어지고, 5세기 중반 서산 부장리 금동관에서 귀갑문이 채용되어 용과 봉황 문양이 같이 쓰이는 변화를 보인다. 한편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 Leeum소장, 국립경주박물관 국은기증 금동관 등은 운기문 계열로서, 수촌리 금동관과 유사 시기에 공존하고 있다. 이 두 계열 중 용문양이 상위, 운기문이 하위 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모두 신성성과 권위를 상징하는것으로 이해된다. 웅진천도 후 입점리 1호분 금동관에 이르러 이 두 계열 문양들이 서로 합쳐져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용문이 없어지고 운기문이 약화되며, 처음으로 연화문계열의 연판문이 등장하여 점차 불교적 상징체계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무령왕릉 관식에 이르러 연화와 팔메트 중심의 불교적 도상으로 완전하게 자리 잡았다. 이후 사비기 귀족층의 은화관식은 보다 간략화 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웅진기, 사비기의 이러한 변화는 현세적 상징에서 내세적 세계관까지를 포괄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불교적 상징으로 변하였음을 보여주며 동시기의 백제 불교 융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판단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