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 한성시기 금동관과 금동식리의 투각 기법
1. 백제 금공의 연원과 시작
2. 백제 투각기법의 수용
III. 백제 투각 육각문의 시원과 전개
IV. 백제 웅진시대의 연속 육각문의 전개
V. 맺음말
요약
김포 운양동에서 출토된 금손톱을 통해 백제에서는 3세기에 금제 장신구에 대한 취향이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한성시기 석촌동 3호묘에서 출토된 금제보요는 중앙아시아, 선비족, 고구려 금공의 계보를 가진 것으로 초기 금공에서 중앙아시아 금공기술을 소화한 고구려 영향을 시사한다. 보요라고 칭하는 것은 장신구의 착용자가 움직일 때 마다 흔들거리는 얇은 원형의 금판을 의미한다. 한성시기의 금제 장신구는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성시기 백제 왕급의 묘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지만 백제의 수장급 묘인 충남 공주 수촌리 1호분과 4호분, 충남 서산 부장리 5호분, 전남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 전북 고창 봉덕리 등에서 중앙공방에서 제작된 透刻 기법의 김동관(金銅冠)이나 김동(金銅) 식리(飾履)가 출토되었다. 투각기법은 얇은 금판을 오려서 문양을 만들어내는 금공의 표면 장식 기법이다. 이 글에서는 백제 금동관과 금동식라에 투각 기법으로 시문된 연속 육각문을 통해 백제 중앙 공방의 기술계보를 분석하였다. 내부에 문양이 배치된 연속 육각문은 아시아의 팔미라(Palmyra), 파르티아(Parthia), 사산조이란(Sasanid Iran), 인도 굽타왕조의 미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2세기 서아시아에서 출발하여 실크로드를 타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로 동점된 연속 육각문은 4세기에 이르면 실크로드와 활발한 통상을 하던전연과 후연의 금속제품에도 등장하게 된다. 요녕성 조양 십이태 88M1에서 출토된 금동제투조안금구는 투각기법으로 연속 육각문이 베풀어지고 그 안에 가릉빙가, 봉황 등의 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그리고 연결점마다 작은 원형에 ㅅ자가 들어간 특징이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연속 유각문은 고구려 덕화리 고분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선비가 수용한 연속육각문이 고구려에 의해 장식문양으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의 투각기법의 수용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연속 투각문과 더불어 컴마 형태를 연상하게 하는 C자형 화염문의 존재이다. 이 C자형 화염문은 고구려 4세기말에 처음 등장하여 5세기 중반까지 유행하다가 소멸한 문양으로 중국에서는 북위의 미술품에만 등장한다. 북위 고원 영하위구르자치구에 위치한 李順墓에서 출토된 칠관에 그려진 삼각화염문은 고구려 계통의 것인데, 고구려의 예보다 50년이 늦는 것이 주목된다. 전연과 후연의 선비족의 금속공예에는 등장하지 않는 C자형 화염문이 백제에 등장하는 것은 선비 금공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금공이 백제에 수용된 사실을 시사한다. 이는 고구려와 정치적으로는 단절상태이지만 금공 기법은 수용한 사실을 반영한다. 한성기에 유행한 연속 육각문은 웅진시기 무령왕릉의 환두대도와 두침과 족좌의 문양으로 계속 사용된다. 이를 통해 한성기의 왕실공방의 기술이 웅진기로도 계속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두침의 경우 평탈기법으로도 이어져 백제 투각기법이 칠공예로도 응용된 것을 확인하였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