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왕흥사지의 발굴
III. 왕흥사 목탑의 사리 안치 방법
IV. 능산리사지의 사리안치
V. 맺음말
요약
2007년 10월, 한국 부여에 있는 백제시대 왕흥사지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불탑지 밑에서 사리기가 발견 되었다. 금, 은, 청동제, 3점의 사리기가 포개서 넣어진 상태로 안치되어 있었고, 가장 바깥쪽의 청동제 용기 측면에 「丁酉」라는 기년명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간지는 서기 577년에 해당되지만, 이 해는 일본의 敏達天皇 6년으로, 그 해의 11월에 백제왕, 즉 위덕왕이 일본에 조불공과 조사공을 보내온 해이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일본에서는 최초의 본격적인 가람을 갖춘 아스카데라(飛鳥寺)가 발원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스카데라는 백제 공인의 지도하에서 조영되었기 때문에 백제사원이라고 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왕흥사의 사리안치에서는 불탑지 기단의 상면으로부터 약 50cm 아래로 100×110×45cm의 석재가 확인되었다. 이 석재 상면의 중앙에 80×80cm의 정방형의 판축시설이 있었고, 이것은 기단상에 심초를 놓기 위한 적심 시설이라고 한다. 이 석재 상면의 중앙부에 적심시설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석재 상면의 남단부에 16×12×16cm의 장방형의 사리공이 설치되었고, 이곳에 사각추대의 돌뚜껑이 덮여 있었다. 사리공의 내부에는 앞에서 말한 사리용기들이 포개어진 상태로 놓여 있었다. 고스기가즈오(小杉一雄)씨에 의하면, 중국 육조시대 목조탑의 사리안치는 사리를 직접 금제용기에 넣고, 이것을 은제, 동제의 용기에 포개 넣고, 마지막에는 석제의 함에 넣어 지하의 심초석보다 더 아래에 매장하였는데, 이러한 사리안치의 양상은 당시 매장의 작법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리안치 방법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던 백제에서는 동아시아의 최첨단 문명인 중국의 불교문명을 수용하는데 있어, 당연하지만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받아들이는 시대인 한성·웅진시대에서 538년에 사비로 천도한 사비 시대가 되면 궁리와 고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577년에 사리를 매장한 왕흥사에서는 궁리와 고안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즉 지상식 심초석 바로 밑에 심초석의 지반강화를 꾀함과 동시에 사리안치의 가장 바깥쪽 용기인 석함의 대용품으로서 심초석에 필적하는 석재를 매납하였다. 석재 상면의 중앙부에는 적심토를 판축하였는데 그 때문에 중앙부를 피해 주변부에 사리공을 만들고 육조시대의 전통인 석함의 뚜껑의 형상과 같은 사각추대의 돌뚜껑을 만들었다. 왕흥사에서는 석재가석함의 대용품이었지만, 심초석 그 자체가 석함의 대용품, 즉 심초석에 사리공을 만들었던 것이 백제 부여의 구아리 절터의 심초석이다. 이 심초석은 시대적으로는 왕흥사의 석재의 사리공과 같은 시기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해서 587년에 발원하는 아스카데라에서는 백제 조사공의 지도에 의해 심초석에 사리공을 뚫고 그곳에 불사리를 안치하게 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