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의 필자는 熊津時代의 都城시설, 陵墓, 宮址 등의 고고학의 연구내용을 日帝下의 36년간과 광복 50년간을 나누어서 언급하였다. 광복 후 1970년도까지 한국학자들이 공주지역에 분포되어있는 유적과 유물을 조사 연구한 것도 日人學者들이 연구한 수단과 방법을 계속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 조사되면서 百濟史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무령왕릉의 발굴이 광복 후에 가장 큰 발굴이었고 그 성과는 한국고대문화사에서 백제문화사의 비중을 재인식시켜 주었고, 왕릉 출토 유물은 A.D. 6세기초 백제조형문화의 위상을 새롭게 확인시켜준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熊津時代의 고고학은 日人學者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百濟유적과 유물을 소개하면서 그 기원을 밝히는데 주력하였고, 그 결과 中國 미술품들과 꼭 같다고 표현하였다. 다시 말하면 모방적인 작품들로 百濟人들의 독창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백제조형문화를 모방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규정지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그 당시 현실에 적응시킨 창의력이 강한 문화였음이 무령왕릉 발굴로 밝혀졌다. 關野貞을 비롯한 日人學者들의 이러한 해석은 자료의 부족과 백제의 유적, 유물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기인된 것으로 판단된다. 광복이후 1970년까지 약 25년 동안은 자료를 발굴하고, 그 자료의 개별적인 내용 해석에만 노력을 경주하고 유적과 유물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데는 큰 진전을 시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백제고고학 연구에 활기를 찾게 되었다. 그 결과 서울, 공주, 부여, 익산 등지에서 커다란 조사 성과를 얻게 되었다. 특히, 熊津時代의 都城의 면모를 대략이나마 파악하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內城의 公山城의 중요시설 성격과 천도 당시의 궁지, 왕실의 사찰, 그리고 中國과 日本의 來往한 통로인 금강의 기능, 선착장인 터미널의 위치 등을 파악하게 된 것은 웅진도성의 경영 대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향후 도성의 구체적인 조사에도 커다란 지침이 될 것으로 믿는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