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웅진천도와 그 존의
III. 웅진지역 유적의 검토
1) 백제이전의 유적 현황
2) 백제시대 유적
IV. 웅진지역 유적의 의미
V. 맺음말
요약
百濟의 熊津遷都를 이해하기 위한 조처로 熊津地域 百濟遺蹟을 검토하여 보았다. 그에 앞서 백제의 南天過程을 상고하였는데, 천도자체가 고구려의 침략에 의한 漢城陷落과 王의 被殺이 원인이라 볼 수 있지만, 高句麗軍이 물러나고 漢城에서 文周가 왕위에 등극한 후 천도가 실행되는 점으로 미루어 단순히 피난이란 조건만으로 백제의 웅진천도를 설명하기에 적지 않은 의문이 남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피난보다는 백제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천도단행의 분위기가 강하다. 때문에 웅진의 도읍지 선정도 지나치게 피난이란 조건만을 考慮, 대고구려 방어에 유리한 지역만 강조하는 것도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文獻記錄에서 백제의 웅진천도를 고구려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惹起된 情況 外에는 詳論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천도지로서 熊津地域의 정황을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백제의 웅진천도 배경을 좀 더 구체화하여 보고자 웅진지역 유적을 검토하였다. 熊津地域인 지금의 공주지역 유적을 百濟以前의 것과 百濟時代의 것으로 구분하여 검토한 결과, 백제이전의 유적은 존재가 인정되나 숫자상으로 많지 않고, 또한 도읍의 중심지에서 거리를 둔채 散布되었을 뿐이다. 반면에 백제 유적은 以前의 유적과 중복되지 않으면서 도읍 중심권에 集中分布하면서 보다 後代의 것과는 중복되는데, 백제유적은 대부분 남천 후에 조영된 것이 집중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熊津地域은 백제의 남천이전에 특정의 세력을 인정한다거나 중앙과 관련한 基盤施設이 거의 없던 空地였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熊津地域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웅진지역의 사방에는 백제의 남천이전, 즉 4-5세기대로 편년될 수 있는 유적이 나름의 세력권을 인정할 만큼 다양하게 남아 있다. 이들 유적은 墳墓가 대부분이지만 土壙墓나 橫穴式 石室墳과 같은 土着的 傳統을 지닌 유적으로, 이를 토대로 웅진 주변에 광범위하게 재지세력이 존재한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로 보면 백제의 熊津遷都는 대고구려 방어에 유리한 입지선정이 작용, 空地인 熊津을 백제왕실이 자의적으로 선택하였는가, 아니면 이들 재지세력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는가의 판단이 요구되는데 선택에 문제가 없지 않지만, 백제가 한성에서 熊津으로 遷都한 후에 대거 신흥귀족세력이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遷都自體를 피난이란 조건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결론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