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하나의 자료인 은제관식에 초첨을 맞추어 재지세력의 문제를 논산 육곡리와 나주 복암리를 통하여 서술하였다. 은제관식은 능산리식 석실의 발생과 전개에서 보면 백제가 부여지방에 도읍을 정했던 A.D. 538년을 상한으로 하여 660년을 하한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체적인 연대관은 6세기 후반~7세기 초라는 연대를 부여하고 있다. 복암리 3호분이나 논산육곡리고분군은 은제관식이나 철제 모심, 대금과와 같은 위세품을 부장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일반 무덤과 공존하고 있는 현상은 공동묘지로서의 고분군을 만들 수 있었던 재지집단 속의 우월자일 가능성을 대변해주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은제관식을 출토한 무덤의 피장자는 지방관의 파견의 증거로 치환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사실상 희박하다. 다만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된 지방관이 지방사회의 세력들을 일정한 통치 구조 안으로 편제해 가는 하나의 방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자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곧 지방관 아래에 편재되어 있었던 재지세력들은 사비지역의 왕 아닌 중앙귀족과 마찬가지로 은제관식, 철심모, 은제대금구를 착용할 수 있었던 점에서 같은 시기 신라의 지방세력들이 부장하고 있는 현상과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무덤의 구조까지 통제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본다. 때문에 부여지방에서 온전한 왕급묘의 발견을 기대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