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이중구연호로 불리우는 토기는 한강유역에서 영산강유역에 이르는 원삼국시대의 특징적 기종 가운데 하나로서, 토기의 명칭이 유래한 이중구연은 구경부를 하나 더 첨가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중구연이란 명칭이 이 토기의 형태적 특징을 잘 반영하지는 못하므로 필자는 일단 대경호라는 새로운 조어를 제시하였다.
대경호의 기원과 관련한 문제는 그간 자세하지 않았으나 요동반도 및 낙랑지역에서도 구경부의 제작기법이 기본적으로 동일한 절경호라 불리우는 유례가 획인되고 그 시기가 대체로 후한만기인 점을 주목해 보았다. 그 결과 요동지방이 공손씨 정권에 의해 지배되던 무렵 한강유역을 비롯한 마한지역의 제세력들이 중국군현이나 공손씨의 본거지인 요령동부지방과 교섭하는 가운데 그러한 절경호를 받아 들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 경우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세력은 역시 한강유역의 伯濟國을 상정할 수 있으나, 대경호의 제작기법이나 기형이 단일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한강이남 중서부지방 대경호가 모두 한강유역의 伯濟國으로부터 일원적으로 확산되었을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대경호는 국가 단계 百濟의 특징적인 토기양식으로서 한성양식 백제토기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대경호의 출현시점은 일본열도의 미생~고분기 토기와 관련하여 볼 때 늦어도 3세기 중엽경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천안, 청주 등 중서부지방의 경질무문토기 존속하한을 200년경으로 보았던 필자의 종전 견해를 수정하여 3세기 중엽경으로 보았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