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대부분의 연구는 공산성과 무령왕릉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왔는데, 근래 조사유적이 차츰 늘면서 이 시기의 유물도 증가추세에 있다. 앞으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①편년체계의 안정화. 백제의 경우 陶瓷 등 중국물품이 다수 출토되었고 문물의 변화를 수반하는 遷都라는 역사적 계기 있으며, 절대연대를 가진 무령왕릉의 존재로 말미암아 신라나 가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편년체계를 세우기 용이하다. 그렇지만 아직 공주 일원의 유적이나 유물을 제외하면 한성시기 후반으로 보아야 할지, 사비시기 초반으로 파악해야할지 분명하지 않아 고고학적 성과를 역사적으로 해석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웅진시기 고고자료의 편년체계를 안정화할 필요가 있다. ②王京내 聚落址의 調査. 웅진시기 왕경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공산성에 대한 조사연구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왕경인들이 거주하였을 금강 이남의 구 공주시가지에 대한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주변 야산이나 능선에 취락지가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지속적인 관심과 체계적인 조사가 절실하다. 史書에 등장하는 대통사의 위치를 찾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국가적인 사찰 주변에는 도로망 등 도시유구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③歷史學界와의 긴밀한 교류 필요. 웅진시기의 백제고고학이 온전한 모습을 찾으려면 지방의 고고자료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학계의 일각에서는 지역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웅진시기의 고고자료를 살펴보면 중앙과 지방이 濟一的이지 않으며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각 지방이 정치적으로도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확대해석하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④巨視的인 視覺 견지. 웅진시기 백제문화는 국제적인 성격이 짙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무령왕릉이 상징해주듯 당시 백제는 중국 남조, 왜, 가야, 신라 등 주변국과 활발히 교섭하면서 매우 개방적인 문화 수용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 때문에 웅진시기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밝혀내기 위해서는 주변국 고고자료에 대한 검토와 비교분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