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주건물이란 가옥형태는 백제에서 발생하여 일본열도로 전래되었다. 벽주건물이 밀집 분포하는 키나이지역과 그 외곽을 대상으로 삼아 이러한 건축물을 남긴 집단의 계보, 고분 및 부장품, 생활용기와 사상 등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오사카, 나라, 교토, 아이치의 대표적인 벽주건물 관련 유적을 선정하여 한반도, 특히 백제와의 관련성을 지닌 요소들을 드러내고 이를 백제지역의 그것과 비교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카와치지역에 속하는 나가하라유적의 방분은 한반도 서남부의 분구식 고분과 유사한 형태임을 알 수 있었으며 이를 근거로 이들이 백제 중앙세력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반면 쿠와즈유적의 경우는 6세기 말 경 飛鳥寺의 축성을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白加라는 중앙의 인물과 관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라의 난고유적에서는 5~6세기에 걸친 벽주건물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세승문을 타날한 도질의 호, 연통 등을 볼 때 백제계는 분명하지만 그들의 기원지를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교토의 모리이가이도유적의 경우도 유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카토리일대의 벽주건물은 야마토노아야히토(東漢氏, 倭漢氏)라고 불린 집단과 관련되는데 이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의 형태와 장제, 부장품 등을 볼 때 중국에서 이주한 후 백제화한 집단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오오미지역의 이주민집단은 문헌적인 증거에서 백제계임은 분명한데 횡혈식석실분에서 소형의 이동식 부뚜막이 출토되는 빈도가 매우 높다. 취락에서는 연통과 온돌이 자주 발견되는 점에서 백제지역과 상통한다.
키나이의 외곽인 토카이지역에도 벽주건물이 분포하고 주변에서 다량의 한식계 토기가 출토되지만 그 형태와 제작방법에서 키나이의 전형적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지역에 이른 시기부터 스에키를 생산하던 가마가 있었던 사실과 유관한데 벽주건물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재지의 사정에 따른 나름의 변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결국 벽주건물이란 하나의 가옥형태를 통하여 백제계 주민집단이 일본열도로 이주하고 확산되는 과정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