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취리산 회맹지를 둘러싼 의문
Ⅱ. 회맹의 역사적 의미와 회맹지 문제
Ⅲ. 회맹지 비정지역에 대한 조사 및 발굴 현황
Ⅳ. 제단의 종류와 위치비정
Ⅴ. 앞으로의 과제와 기대
요약
웅진도독 부여륭과 신라 문무왕이 665년 8월 웅진성의 취리산에서 만나 회맹을 가진 역사적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 뒤편의 작은 산을 우리는 지금 취리산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정작 부여륭과 문무왕의 회맹지였던 옛 취리산의 역사현장이 어디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나와 있지 않다. 크게 현재의 취리산과 연미산으로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취리산 회맹지를 둘러싼 문제를 백제사에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로 만들었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의 회맹지에 대한 조사와 발굴 활동을 포함한 몇몇 내용, 그리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제단(祭壇) 및 회맹 관련 사료들을 비교, 분석하여 현재의 취리산과 연미산 중 과연 어느 산이 회맹지로서의 가능성이 큰지 추적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다.
첫째, 취리산 회맹 당시의 제사대상은 하늘이 아니라 산천이었다. 따라서 중국 기준으로 볼 때 취리산 회맹지 역시 연미산처럼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보다는 현재의 취리산처럼 작고 낮은 산이 후보지로 더 적합하며, 제단 역시 석축기단을 쌓아 올리기보다 땅을 깎고 다듬어 만든 토단(土壇)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둘째, 취리산 회맹지의 제단은 천단(天壇)보다 지단(地壇)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지단이 북쪽에 설치되는 중국의 예에 비추어 볼 때 취리산 회맹은 공주 서쪽의 연미산보다 북쪽인 현재의 취리산에서 거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셋째, 춘추시대 중국의 제후들 사이에서 행해진 회맹과 관련된 내용을 검토해 보아도 같은 결론이다. 춘추시대 천자나 제후들은 비어있는 땅을 회맹장소로 사용했고, 높은 산을 회맹장소로 삼은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당대(唐代)에는 천단산(天壇山)의 예처럼 산 정상부보다 접근성이 용이한 아래의 낮은 지역에 제단을 만든 경우가 눈에 띄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취리산 회맹지는 연미산보다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 뒷산인 현재의 취리산으로 보아야 여러 정황에 부합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