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東지역은 赤山 法華院을 비롯하여 신라인과 관련된 유적이 가장 많이 확인되지만 재당 한국인과 관련된 구체적인 불사활동을 실물로 찾기는 쉽지 않다. 《益都縣圖志》卷27 <金石志>中의 기록을 통해 718년 淸州 石塔寺의 重修와 719년 석탑을 찬양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고, 張家莊에 거주한 金四>金大用>金存의 공양자는 현지에 거주한 신라인으로 추정된다. 河南지역에서는 龍門石窟에서 재당 한국인의 석굴, 불감의 조성이 집중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용문석굴을 중점적으로 조사하였다. 藥方洞(第1381窟)내부 北壁의 1699號龕과 北市絲行龕(第1504窟)은 명문을 통해 고구려인 王思禮, 雙窯北洞(第521窟) 내부 南壁 0520號龕은 金莫神, 雙窯南洞(第522窟) 外壁의 0562號龕은 신라 승려 慈藏, 第0877號龕 외부의 夫餘氏 造像龕은 백제인 부여씨, 第484窟 新羅像龕은 신라인, 奉先寺洞(第1280窟) 1628號龕은 신라인 王訓이 발원하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河北지역에서는 《全唐文新編》券445의 ‘易州抱陽山定惠寺造文殊師利菩薩記’에서의 기록을 통해 774년 만성현 抱陽山에서 隴西郡王 李寶臣이 신라인 談藏의 권유로 정혜사에 문수사리보살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보신은 신라 이외에 고구려 출신 李正己와는 전쟁에서 공훈을 함께 하였고 이정기의 아들 李納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기도 하였다. 江西지역에서는 817년 白居易가 친구 17인과 더불어 廬山을 여행하면서 大林寺에서 기거하였는데, 『白居易集』 ‘游大林寺序’에서 대림사에 대해 묘사하였다. 대림사는 아주 외딴 곳에 위치한 사찰로서 이 곳에 거주한 승려는 모두 海東이라고 하였다. 江蘇城의 西明寺는 唐代 棲靈寺로 명명되었고 이 곳의 서영탑은 843년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 화재로 소실되는 탑의 상황에 대해 《重修楊州府志》 券上에서는 하늘에서 탑 하나가 날아 갔는데 國使가 고려에서 다시 가지고 왔다고 한다. 기록의 허구성은 뒤로 하더라도 당대 양주지역의 최대 사찰인 대명사와 신라와의 밀접한 관련을 시사하고 있다. 新疆지역의 阿艾石窟은 1999년 발견된 1개의 석굴로, 서쪽 벽면에 그려진 文殊師利菩薩상의 發願者는 “似先“으로 高麗扶餘種이다. 이 사선천은 고구려 멸망 이후 신강지역으로 재배치된 고구려인이거나 혹은 그 이전시기 이주를 통해 이 곳에 거주하였을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唐代에 들어서면 신라인들의 중국 내 불사활동 참여가 눈의 띄게 늘어났지만 고구려 출신혹은 고구려 후예들의 불사활동도 여전히 보인다. 唐代 석굴, 사원, 佛龕등을 조성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도 있고 현지에 거주한 일반인,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모두 있었다. 또한 天龍山石窟 제15굴, 용문석굴 신라상감 이외의 당대 용문석굴에서 확인되는 신라, 고구려인 참여 불감은 규모가 작다. 결국 중국에서 불사활동에 참여한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은 개착규모가 작은 석굴 혹은 불감, 벽화를 조성한 경우가 대다수이며 당시 성행한 석굴구조, 조각양식, 벽화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들이 불사활동에 참여하였지만 경제적인 지원만을 하였을 뿐 현지의 공인들을 고용하여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