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II. 죽막동제사유적을 통해본 백제 해안제사유적의 특징
III. 왜 오키노시마제사유적과 죽막동제사유적
IV. 5~6세기경 백제와 왜사이의 외교관계를 반영하는 죽막동제사유적
V. 결어
요약
5세기후반~6세기전반경 百濟 西海岸地域 竹幕洞祭祀遺蹟에서는 鐵斧, 나이프, 갑옷 등 돌을 이용하여 축소 模型으로 제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유물은 당시 倭에서 盛行한 倭樣式 祭祀遺物의 一種이다. 따라서 竹幕洞祭祀遺蹟에서의 이들 石製模造品 발견은 이곳에서 倭의 使臣 혹은 商人들에 의해 倭樣式 祭祀行爲가 거행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示唆한다. 이 유적에는 倭系石製模造品 이외에도 많은 百濟지역 유물과 더불어 中國 魏晉南北朝時代의 靑磁, 大加耶系 馬具 등 국제적인 성격의 유물들이 獻供되어 있었다. 이점을 중시하면 죽막동 露天祭祀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百濟人 이외에 백제를 왕래하던 船舶에 乘船한 中國南朝人, 大加耶人, 倭人 등 다양한 국적의 소유자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곳에서의 제사행위 參席을 위해 근처의 항구에 碇泊한 船舶 중에는 國際的인 交易船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렇게 竹幕洞祭祀遺蹟에서 中國 南朝系 靑磁와 大加耶系 馬具 등이 발굴되었지만, 이곳에서 中國 南朝와 大加耶의 使臣 혹은 商人들에 의해 各各 中國南朝와 大加耶樣式의 海岸祭祀가 어떤 形態로 거행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竹幕洞祭祀遺蹟에서는 中國南朝와 大加耶樣式 海岸祭祀의 특징이 아직 명확히 분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現在 竹幕洞祭祀遺蹟에서 外國樣式 祭祀行爲 存在를 示唆하는 유력한 考古資料는 石製模造品을 祭具로 이용한 倭樣式 露天祭祀 痕迹이라고 할 수 있다. 竹幕洞遺蹟 露天祭祀에 참석하기 위해 國際的인 交易船에서 下船한 各國의 使臣 혹은 商人들은 倭人들에 의해 거행되는 石製模造品을 이용하는 특이한 倭樣式 제사행위를 목격하였을 것이다. 百濟와 倭의 긴밀한 親緣關係를 반영하는 이러한 祭祀 光景은 各國의 使臣 혹은 商人들에 의해 주변 諸國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즉 이러한 제사행위로 인하여 百濟와 倭는 兩國사이의 긴밀한 親緣關係를 적대적인 高句麗에게도 誇示하는 效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5세기후엽 百濟는 高句麗의 공격으로 首都 서울이 陷落되고 공주로 遷都하게 된다. 이 時期 百濟의 政治·外交的인 最大 課題는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倭의 경우는 고구려에 의해 초래된 불안정한 한반도 정세 속에서 必需物資 등 先進物資의 안정적인 輸入을 維持하는 것이 政治·外交的인 最大 課題였을 것이다. 이러한 不安定한 韓半島 情勢를 극복하기 위해 百濟와 倭가 선택한 共通的인 外交戰略은 兩國 사이의 親緣關係 强化를 기초로 하는 多元化된 새로운 廣域交易體系 構築이었을 것이다. 竹幕洞祭祀遺蹟에서의 倭樣式 祭祀行爲 擧行과 같은 百濟와 倭사이의 親緣關係를 誇示하는 儀式行爲는 高句麗의 威脅을 저지하려는 百濟와 倭가 시도한 外交戰略의 一環이었다고 評價할 수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