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
Ⅱ. 資料 및 관련 문제
1. 龍口博物館 細形銅鉾
2. 登州博物館藏 白色土器
3. 登州博物館藏 靑瓷 獅子燈
Ⅲ. 戰國-兩晉時期 山東과 韓半島 사이의 海上航路
Ⅳ. 맺음말
요약
山東半島 東北部→廟島群島 및 渤海 海峽→遼東半島 南端→韓半島 西海岸으로 이어지는 ‘北路 北線 航路’는 龍口博物館藏 短鋒小形細形銅鉾로써 늦어도 기원전 3세기 3/4분기 무렵에는 이미 개시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이 항로는 漢代의 樂浪郡 지역과 산동 동북부 사이의 무역로로 활발히 활용되었음은 蓬萊博物館 소장 白色土器 및 최근 발견된 龍口 埠下家 漢 白陶窯址등으로써 잘 알 수 있다. 요동반도에서 공손씨 정권이 자립한 189년부터 조위에 멸망되는 238년 기간동안 이 항로는 낙랑․대방 등 중국 군현과 산동반도 사이의 무역로로서 특히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낙랑지역에서 백색토기가 소멸되는 시점과 공손씨정권의 몰락이 거의 동시였다는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공손씨정권은 209년 이후 238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장강유역의 손오정권과도 해상 교통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 長江河口→江蘇省 沿海→山東半島 沿海→遼東半島에 이르는 항로가 개척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西晉代에 들어서도 ‘북로 북선 항로’는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해상 교왕로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遼陽 上王家 晉墓 출토 靑瓷 虎子․平壤 樂浪區域 東山洞 壁畵墓 출토 청자 獅子燈․傳 開城 출토 청자 호자 등의 문물로써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백제 풍납토성 및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전문도기 등도 이 무렵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東晉代 371년 혹은 372년에 이루어진 백제와 동진 사이의 공식 修交時에도 이 항로가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高句麗가 遼東半島를 장악한 409년 이후에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정치적․군사적 긴장관계로 보아 ‘북로 북선 항로’의 안정성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소지가 다분하다. 이 무렵 새로 개척된 항로가 韓半島 西海岸 中部→黃海 橫斷→山東 膠東半島 成山角→長江河口의 ‘北路 南線 航路’였을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