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대 사리의 봉안에 대해서 사리용기와 사리장엄구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몇 가지 점에서 일본 독자의 양상이 확인되었다. 먼저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의 초기 사원의 경우, 가장 오래된 飛鳥寺(비조사)를 제외하면 사천왕사와 중궁사 등은 심초 주변에 사리를 안치하지 않는 점이다. 비조사와 함께 최고의 사원 가운데 하나인 法隆寺(법륭사) 약초가람의 탑 심초에도 사리공은 확인되지 않았다. 아마도 초기 사원에는 심초가 아니라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大野丘(대야구)의 북탑과 같이 기둥 꼭대기의 노반부분에 매납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석가의 무덤으로서 노반과 상륜부분이 중국에서 누각 건설과 이어지는 탑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양상이다.
7세기 후반이 되면 탑 심초에 사리공을 뚫고 거기에 사리를 안치하는 형태로 변화한다. 그 변화는 이전까지 전통적 의례였던 고분 제사의례와 立柱(입주)의례가 합쳐진 결과이다. 즉, 사리의 안치를 地鎭祭(지진제)와 고분의 석실·석곽에 사자를 매장하는 것과 같은 양상으로 지상의 높은 노반이 아니라 심초에 묻는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