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는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약 40년이 지나서 건립된 사원임이 발굴조에 의해 밝혀졌다. 그리고 그 10년 전에는 왕가의 능사로서 능산리사가 건립되었다. 6세기 후반에 성행한 백제 사원의 건립이 그 영향 아래 본격적 사원을 조영한 일본의 동향과 관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종래, 건축과 기와 등이 주된 연구대상으로 백제와 일본의 초기 불교의 비교검토가 행해져 왔는데 왕흥사의 불굴조사에 의해 사리용기와 장엄구 등에 대해서도 양지역의 비교자료가 충실해 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불교라고 하는 체계적 종교의 사상과 신앙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본질적인 비교가 가능한 자료이다. 더욱이 당시 사회와 정치적인 측면도 엿볼 수 있다
사원의 건립목적, 사리장엄구 매납 의식, 그리고 장엄구에 사용된 여러 물품의 본래 성격과 기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으로 사리장엄구는 불구로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여러 면을 반영하는 자료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장엄구는 당시 사회의 물적, 심적으로 귀중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 매납품에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공통되는 것과 독자의 것이 있는 것은 지역과 시대를 넘어 보편적가치를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와 지역 별로 다른 물품이야말로 그 사회의 가치관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맺음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