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城里山城은 하천곁의 낮은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의 규모는 580m의 비교적 작은 토성이다. 토성은 판축으로 되어 있고, 井址가 성 밖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토유물은 연질의 백제토기편부터 조선시대 자기편이 출토되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유물은 없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대와 고려시대에는 일시 폐성되었다가 다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은 지형과 지리적으로 보아 전투용산성이 아니고 保民用山城이라고 하는 점에서 특징이 있으며 그 上限年代는 B.C. 4~2C경까지 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추정한다. 성의 축조시기는 A.D. 5~6C 백제 웅진시대로 보여진다. 성은 580m의 규모에 남북 2區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또한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인문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선사시대 유적지와 관련시켜 볼 수 있는 산성이라고 하는 점에서도 중요시되는데 대구 달성이나 청도의 伊西國城에 비견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는 선사시대 유적지와 관련된 산성으로 판단되어 발굴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을 확정할 수 있으므로 결론은 일단 발굴 후로 미루어 둔다.
儒城山城은 城周 약 710m의 포곡형으로서 비교적 작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백제 수도 웅진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A.D. 5C 후반에서 A.D. 6C 초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이 전투용산성이라고 추정되는 이유는 규석(차돌)의 砥石이 발견되고 內壕가 설치되었다고 하는 점에서이며, 지형과 지리적 위치로 보아서도 전투용산성이므로 保民用山城인 구성리산성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두 산성이 위치하공 lT는 곳은 조선시대에는 유성현에 속해 있었고 백제시대에는 奴斯只縣(斯一作叱)이었다고 하는 바 신라 경덕왕 때 유성현ㅇ르ㅗ 개명하였다고 한다. 이 치소가 정확하게 어디쯤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런데 백제 멸망 후에도 內斯只縣(奴斯只縣)에서는 백제 殘賤들이 반항을 하니 金欽純 등 19장군들이 토벌하여 격파하였다고 한다. 10년 전에 발표한 위 글에서 본인은 奴斯只縣의 위치를 구성리산성에 비정하여 발표한 바 있으나 최근 심정보교수는 유성산성에 비정 발표하였다. 본인이 다시 검토한 결과 유성산성이 전투용산성이라고 하는 점에서 심교수의 비정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奴斯只縣의 치소로서는 지형상으로 보아 구성리산성이 합리적일 것 같으며 그 治下에 있었던 산성인 현 유성산성에서 백제부흥군의 운동이 벌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백제부흥운동은 갑천유역에 있는 眞峴城·甕山城(계족산성)을 비롯하여 구성리토성·유성산성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것으로 수정 판단하는 바이다. (필자 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