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Ⅰ기(3세기 중후엽~4세기 전반)에는 대략 洪城-天安線으로 이어지는 錦江 以北 지역까지 백제의 境域에 포함되었으나, 한성 Ⅱ기(4세기 후반~475년)에는 근초고왕의 남정으로 대략 ‘比利’, ‘辟中’ 등으로 나타나는 금강이남의 전북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금강유역의 토착세력이었던 木氏세력의 협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이후 한성기의 귀족으로서 대가야, 영산강유역, 왜 관계에 활약하였다. 이 무렵 이후 영산강유역 정치체는 한성백제와 ‘지배적 동맹관계’라 할 만한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 반남고분군 축조집단은 이러한 한성백제와의 관계설정을 통해 지역통합력을 원활히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 이면에는 백제-대가야-영산강유역-왜 라는 대고구려연합세력 구축이라는 백제의 정치적 목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계는 백제의 남천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고구려의 위협이 감소되면서 백제로부터의 대가야세력의 이탈, 백제의 남방영역확대에 수반된 영산강유역 반남세력의 구심력 소멸과 그에 따른 주변세력의 재지수장층의 자립성 제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나주 복암리 3호분 96석실분의 등장과 시기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보이고 있다. 한편 섬진강유역의 호남동부지역의 대가야권 및 전남 동부 해안지역으로의 진출에 주력하고 있던 백제로서는 반남세력의 구심력 약화라는 전략적 목표에 부합하는 외곽재지수장들과 왜의 교류를 용인함으로써 왜 세력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가야권으로의 진출이 마무리되고 530년경에는 안라지역을 높고 본격적으로 신라와의 대결구도가 형성됨에 이르러 백제는 왜왕권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이에 필요한 용병과 같은 인적자원을 확보하는 한편 그 반대급부로서 중국남조문화를 왜왕권에 독점적으로 공급하였다. 이는 영산강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 群小勢力과의 대외교섭을 통해 존립기반이 확보되었던 일본열도의 지역세력, 특히 九州勢力의 불만을 고조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가 527~528년에 걸친 筑紫君 磐井(이와이)의 亂이었다.
磐井의 亂이 평정된 후 欽明朝는 직접 왕권이 미치는 屯倉을 각지에 설치함으로써 직접지배의 목표를 달성하게 되고 백제 역시 영산강유역을 포함한 새로운 영역에 대한 완전한 직접지배가 실현되었다. 이는 백제↔영산강유역↔九州勢力↔倭王權 이라는 多核的 대외관계가 백제↔大和政權의 쌍방구도로 재편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은 한성 Ⅱ기 이래 유지되던 백제-대가야-영산강유역-왜 라는 대고구려연합구도가 백제의 남천으로 와해되고 새로이 백제-大和朝廷 연합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확립되기까지의 과도기에 나타나는 영산강유역 주변세력 및 일본열도 재지세력권의 제한적 역동성의 산물로 이해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