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유역이 백제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475년 웅진천도 후의 일이다. 천도와 더불어 백제의 사회, 문화의 중심에 자리한 금강유역은 고대사회 백제가 향유한 문화유산이 그대로 남겨진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백제는 이 지역에 자리하면서 폭넓은 문화경험을 하였고, 그 결과 이 지역에 다종다양한 문화유산을 남겼는데 고분자료도 그 중의 하나이다. 특히 분묘는 장제의 부산물로 남겨진 것에 불과하지만, 무덤의 축조방식과 관련된 제반요소, 그리고 부장품 등을 통해 당대의 의식구조 및 사회의 단면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분묘가 지닌 전통성으로 말미암아 구성원의 성격파악에서 어느 정도 유용성이 인정되고 있다.
백제분묘는 묘제적 다양성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이는 백제사회 구성세력의 다양성을 대변하는 것이기에 묘제의 이해는 사회상의 이해와 직결되고 있다. 이를 방증하듯이 금강유역의 백제고분도 다양성이 두드러지고, 그 변화의 역동성도 자못 크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지역도 475년 남천이전에는 백제의 지방사회였었고, 따라서 고분문화의 전개도 중앙보다는 지방묘제의 범주에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백제의 웅진천도 후에 백제묘제 전개의 중심축에 자리하게 된다. 물론 이후의 금강유역은 백제고분문화의 전개의 장으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
금강유역의 백제고분의 환경은 백제 후기 고분문화의 실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백제 후기의 고분문화는 횡혈식석실분이 묘제의 주류를 이루면서 점차 다양한 묘제가 일원화되는 과정을 겪게 됨을 특징으로 한다. 금강유역은 백제 횡혈식 석실분 묘제의 전개 현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이를 반증하는 분묘자료가 도처에 산재한다. 그러나 이들 분묘자료는 비단 묘제적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상의 단면을 이해하는 수단이기에 고고학 자료로서 나아가 역사적 자료로서 그 중요성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필자 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