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3월에 처음 학계에 알려진 신봉동 고분군은 지금까지 모두 4차례 발굴조사가 되었다. 이번 4차조사는 전시관 건립예정지에 대한 발굴조사로 이번에 새로이 백제 화장묘가 찾아지는 성과를 얻었다. 신봉동 유적에서는 지금까지 백제권에서의 무구·마구·생산용기 등의 보다 많은 자료를 제공하여 주었다. 또한 많은 양의 토기들은 백제토기 연구의 새로운 자료로서 큰 몫을 이루게 되었다.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1992년에는 신봉동의 고분들이 山頂에서 山下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화하며 영조되었는지에 대한 해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지금까지 4차례의 조사로 신봉동의 고분군 전지역 가운데 약 3,000여평 정도의 발굴조사로 아니되는 범위에 걸친 한계는 있으나, 하나의 능선을 꿰뚤어 고찰할 수 있는 자료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지금까지 조사 결과 백제시대 토광묘는 산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광묘는 남·동쪽 경사면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북쪽 경사면은 밀집도가 비교적 낮다. 해발 89m부터는 토광묘의 밀집도가 낮아지고 석실분이 등장하면서 일정기간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이곳에서 조사된 석실분은 해발 90m 이상의 정상부와 능선부에 위치하고 있다.
토광묘의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나란히 자리 잡았고, 축조 초기 단계인 산 아랫부분은 부장유물이 매우 단순하고 적다. 묘광 바닥에 강자갈을 깔았던 무덤 5기(90B-1·92-80·83·109·111호)는 묘광이 크고 깊으며, 부장된 유물(토기·장신구·마구류·둥근고리긴칼 등)이 많은 점에서 그 당시 상류 계층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마구류는 해발 70m 이하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고, 윗부분으로 갈수록 많이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초기 단계(4세기 중엽) 이후에 사용되고 부장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석실분은 천정부가 남아 있는 것은 1기도 없었지만, 석실구조로 보아 궁륭상 천정이었다고 해석된다. 모두 반지하식 횡혈식으로 연도부에는 천정석이 없고, 연도에 이어서 묘도가 있는 2기(92년도 조사분)가 있다.
이곳에서는 2,5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백제의 전형적인 토기(독·항아리·단지·접시 등)와 마구류가 많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특히 철제갑옷, 투구, 화살통, 큰손잡이잔은 백제지역 무덤에서는 처음 나온 것이로 이곳의 지역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