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토기는 燒成度에 따라 赤褐色軟質土器, 灰(黑·白)色軟質土器, 灰靑色硬質土器로 구분되며 문양은 주로 繩文과 格子門이 打捺手法으로 시문되어 있다. 그러나 黑色磨硏土器와 같은 특수 기종은 표면처리나 문양구성에서 일반적인 토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기종은 약 20여 종으로 그 가운데 삼족토기와 직구호, 고배는 백제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고 삼족토기는 백제의 가장 고유한 기종이다.
한강유역에는 백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고고학적 지표인 성곽과 대형고분이 집중되어 있는데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를 진정한 의미의 백제토기로 규정지을 수 있고 그 시기는 대체로 3세기 중후반에 해당된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는 원삼국시대의 토기를 계승한 것과 국가 출현과 더불어 새로이 나타나는 기종이 있다. 특히 黑色磨硏土器는 前時代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양식으로 백제토기의 성립 지표가 되고 있다. 그리고 토기의 형태변화와 더불어 회청색 경질토기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작기술도 크게 발전하게 된다.
한편 각 유적의 성격에 따라 발견되는 토기는 주요 기종 및 組合狀에서 차이가 발견된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등 성곽유적에서는 여러 유형의 삼족토기와 고배, 대형 호·옹류와 흑색마연토기가 상당수 발견되지만 분묘유적인 馬霞里 분묘유적에서는 심발형토기와 난형토기가 주 기종을 이룬다. 또한 주거유적에서는 심발형토기와 장난형토기 호·옹류 등 실생활용기가 주요 기종으로 발견된다. 곧 한강유역의 두 성곽에서 출토된 토기는 일반적인 실생활용기보다는 의식용 성격이 강한 새로운 기종으로 국가적 祭儀 필요성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마하리유적의 심발형이나 난형토기는 원삼국시대의 분묘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분묘라는 전통적인 특수성이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금강유역에서는 중부내륙지방과 하구를 중심으로 하는 서해안지역은 분묘유적과 더불어 토기에서도 차이점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곧 금강중유역의 내륙지역인 청주 신봉동과 대전 구성동에서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말엽까지 토광묘가 축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금강 하구에 위치한 논산과 익산지역에서는 토광묘 대신 수혈식 석곽분이 주묘제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양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를 비교하면 신봉동에서는 단경소호, 원저광구호, 심발형토기가 주요 기종이며 특히 把手付杯는 이 지역의 독특한 기종이다. 구성동에서 출토된 장경호는 백제가 아닌 영남지방 계통의 토기로 파악하고 있다.
금강 하구의 연산지방이나 익산지방의 수혈식이나 횡구식 석곽묘에서는 각각 차이는 있지만 고배, 개배, 직구호, 단경호, 삼족토기가 주요 기종으로 한강유역토기와 많은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연산지방의 기대는 신라나 가야에서 그 계통성을 찾고 있는데, 신봉동의 把手付杯와 구성동의 장경호와 같이 다양한 토기상을 살필 수 있다. 또한 최근 천안 용원리의 수혈식섞곽분에서 출토된 黑褐釉天鷄甁과 화성리의 盤口甁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의 중앙 및 지방세력집단은 한반도 여러 지역은 물론 중국과도 상당한 교류를 통해 백제토기는 다양성을 가지고 발전해 나갔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금강유역에서는 중앙과 다른 유형의 묘제들이 조영되고 있지만 그 부장토기의 기종이나 형태를 보면 한강유역의 토기들과 같거나 변화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지역이 5세기 중엽경에는 이미 백제세력에 편입된 것을 의미한다.
영산강유역은 주지하다시피 대형 옹관고분이 집중적으로 축조되고 있는 지역으로 백제의 일반적인 문화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어 지역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정치와 문화는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화적 제반현상은 일시적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지속기간을 가지는 특성 때문에 이 지역이 백제와 전혀 다른 정치체라는 견해는 신중을 요구한다. 대체로 영산강유역에 있어 백제의 영역에 편입되는 적극적인 고고학적 근거는 횡혈식석실분의 축조를 그 표식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금강유역의 경우 청주를 비롯한 내륙지방에서는 토광묘가 금강 하구지역에서는 수혈식석곽분이 주묘제로 채택되고 있지만 이를 백제와 전혀 다른 정치체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산강유역에서도 옹관고분은 모두 백제와 무관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백제토기는 지역성이 강한 전통을 계승한 토기와 석실분 출현이후의 토기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兩耳付壺나 二重구연호의 경우 그 분포범위가 충남 서해안지역까지 넓게 분포하지만 점차 영산강유역으로 국한된다. 그리고 방형이나 원형으로 정형화된 대형 분구묘가 축조되며 長頸壺나 有孔廣口小壺같이 지역성이 강한 독특한 기종이 출현하지만 백제 고유의 토기인 삼족토기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백제세력의 성장과 더불어 마한세력이 영산강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옹관고분에서는 4세기 전반경부터 영산강 이외의 지역과 다른 토기양상을 띠며 오히려 가야지역의 것들과 통하고 있고 이 지역의 독특한 토기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원인은 백제의 남진에 따른 긴장관계가 조성되면서 백제보다는 가야나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통한 영산강유역의 정치체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고학적인 증거로 해석된다.
영산강유형의 석실분에서는 옹관고분의 토기와 대체적으로 비슷한 양상이지만 이곳에서 보이지 않던 고배와 기대와 같은 새로운 기종들이 부장된다. 한편 부장된 개배의 수량이 증가하며 토기호의 경우는 백제토기의 일반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造山古墳에서 보듯이 유공광구소호는 넓게 벌어진 구연과 頸部에 장식이 부가되는 등 후기적인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이후 전형적 백제 횡혈식석실분인 웅진 3식이 집단적으로 축조되면서 출토 토기의 기종구성이나 그 형태에 있어 백제 전 지역과 같은 양상이다. 곧 영산강유역이 백제에 완전히 편입된 증거이며 그 시기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근 영광 대천리 초기유형의 석실분 내에서 백제토기가 출토됨에 따라 백제에 완전 편입된 시기는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