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面佛像이 출토된 예산군 봉산면은 서쪽으로 서산군을 접하고 있으며 백제의 최고 불상과 마애불이 造像되었던 북서부지역으로 보원사지 金銅如來立像, 金銅一光一尊佛像, 泰安·瑞山磨佛佛 등이 출토되고 현존하는 지역이다. 가야산 줄기로써 가야산은 통일신라시기에는 오악의 하나로 중요한 국가적 제사의 中祀에 편입되었던 대표적인 명산으로 백제시대 창건으로 전하는 수덕사가 있다.
예산은 백제건국 초기부터 영역에 포함되었던 대륙교통의 요지와 농산물이 풍부한 평야지대로, 웅진·사비시대에는 백제의 북부지역으로 고구려의 남하세력을 저지하는 전진기지로 국경선을 접한 국방력의 집중은 웅진시대의 중앙귀족집단의 일부 세력인 해씨·연씨 등의 국사적인 기반을 가진 근거지로 매우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의 조공에 따라 선진문물이 수용되었던 길목임이 강조되고 있지만 통로로서의 一面보다는 정치적 경제적인 바탕을 가진 중앙귀족을 배출할 수 있었던 호족을 중심으로 한 信徒나 귀족의 재력에 의해서 造像되었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지리적 여건은 대륙과 해로의 요충으로 고구려와 정치 군사적인 면에서 백제는 개로왕때부터 육로를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우 험난한 해상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해상의 활동도 고구려의 해군의 방해를 받았지만 현재의 태안반도의 작은 漁港보다는 內海와 같은 아산만을 이용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의 대륙 조공 통로가 아산만 입구인 南陽灣이었음에서도 볼 수 있다.
백제가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령으로 웅진 천도후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雄志를 펼 수 있는 바탕을 조성한 것은 동성왕 시기라고 보이며 무령왕 때에는 불교의 발전을 도모한 시기라고 하겠다. 백제승 發正이 중국에서 30여년을 修學하고, 무령왕릉 塼室의 蓮花文과 王·王妃의 冠飾, 頭枕·足座 등에서 보여주는 불교적인 요소 등이 이를 증명하며 성왕대에 대통사, 정림사의 창건과 겸익의 天竺國 修學, 五部律의 번역 등 국가적인 노력의 소산이며 일본으로 經書, 丈六佛像 등의 전달은 백제의 造像能力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북서부지역의 보원사지 금동여래입상은 6세기 중기의 백제의 대표적 불상이며 태안·서산마애불 역시 7세기 초기의 최대의 巨作이다. 이 예산 백제 사면불상은 동, 서, 남, 북의 방위에 의해 四方淨土에 군림하는 불교신앙으로 어느곳에나 부처님이 계시다는 내용을 형상화하였으며 佛經典에 충실하기 보다는 그 시대, 사회가 요구하는 부처님을 모신 호국과 祈福의 뜻을 담고 있다. 이 四面佛의 문헌기록과 유적조사 내용에서 본 것 중에, 가장 오래된 6세기 중기 작품으로 보이며 開慶 大乘寺 四佛山 四方佛, 榮州 石浦里 四方佛, 忠南 燕岐 石佛碑像, 慶州 神印寺 四方佛, 掘佛寺址 四面石佛, 南山 七佛庵 四方佛로 시대적으로 연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유적지 위치에서 볼 수 잇는 바와 같이, 예산, 개경, 영주로 이어지는 동, 서방향으로 나타나고 있어 고구려와 대치된 백제 신라의 국경지대로 造像年代도 6세기 중기에서 7세기 초기에 이르는 통일이전의 호국적인 영역의 확장이나 정복적인 의욕을 보이며 재래의 종교적인 地神과 天神의 加護를 佛陀로 대신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통일 후의 연기 석불비상의 명문과 같이 大王, 大妃, 祖上의 명복을 빌어 호국과 개인의 복을 구하고 있다. 마애불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조각은 극도의 丸彫性을 보여, 頭部는 완전히 광배와 분리하여 별도로 제작된 金屬佛처럼 되었고 전형적인 백제 연화문의 頭光, 화려하고 정교한 불꽃무늬 광배, 通肩의 깊은 음각선 무늬, 印契의 通印, 가슴의 허리띠 매듭 등 중국의 東魏天平年間과 梁 四川成都 출토 석불입상 등과 비교할 수 있겠다. 중국 내의 남북조양식들의 상호간의 문화교류와 고구려나 백제의 대외관계에서 남북조에 대한 同時 문물교류를 주의깊게 관찰하여야 되겠으며 일방적으로 남조나 고구려의 문화의 영향을 백제가 받아들였음을 강조하는 점은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믿으며 삼국시대 상호 정치적인 면에서 적대적 상황을 맺어왔음도 주의하여야 되겠다.
이 예산사면석불의 조성연대는 서기 550년 전후이며, 소멸시기는 여지도서에 있는 静修庵이라고 판단되어 지금부터 적어도 약 150년 전에는 廢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안동권씨 족보에서 본 바 같이 불상이 서 있는 곳에 접하여 幽宅을 마련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어 19세기 초기에는 석불이 인위적으로 파손되었다고 하겠다. (필자 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