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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미술

백제 정림사 창건을 통해 본 대중관계(百濟 定林寺 創建을 통해 본 對中關係)

  • 분류 고고·미술 > 건축
  • 권호수 제81집
  • 저자 이다운
  • 발행일 2012년 12월
  • 게재지 중국사연구
  • 발행처 중국사학회

목차

Ⅰ. 머리말
Ⅱ. 定林寺 창건 연대
1. 木塔 건립을 통해 본 창건 연대
2. 伽藍配置를 통해 본 창건 연대
3. 출토 유물을 통해 본 창건 연대
Ⅲ. 定林寺 창건과 對中關係
Ⅳ. 맺음말

요약

필자는 정림사지 5층석탑의 건립 시기를 창건 가람의 탑은 목탑이었으며 석탑은 목탑이 소실된 후 건립되었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정림사지 출토 소조상이 기존의 연구 결과대로 북위 洛陽 永寧寺와 일본 奈良 法隆寺 5층목탑에서처럼 목탑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석탑보다는 잔존한 기단에 비례하는 목탑이 들어섰을 때에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가람을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륵사지 출토 유물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석탑은 639-660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보았다.
최근 발굴조사에 의해 정림사지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가람배치가 밝혀졌다. 동․서회랑지 북단에 승방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익산 제석사지(639년 소실)에서도 확인되었는데 가람배치 변천 연구에 따르면 능산리사지(567), 왕흥사지(577)에 이어지는 가람배치로 판단된다. 이러한 변천은 사리장치 변화 양상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데 7세기대 사리장치 특징을 갖고 있는 제석사지를 참고하면 가람배치에서 시기적으로 앞서는 정림사지는 6세기 4/4분에 비정할 수 있다.
정림사지 소조상이 북조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그 시기에 있어서 567년 이전에 북조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들어 사비천도 후 남조 양과 교류가 있었던 541년에 북조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남조의 소조상 문화가 백제에 전래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필자는 오히려 북조와의 교류가 왕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는 567년 이후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며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창건에 사용한 수막새를 추정하고 편년하였다. 유구와 유물에 대한 검토로 얻어진 연대관을 종합해 보면 정림사는 577년 이후의 위덕왕대 창건한 것으로 이해된다.
위덕왕은 한 때 관산성전투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궁지에 몰리기도 하였지만 패사한 부왕과 죽은 왕자를 위해 능산리사지와 왕흥사를 창건할 정도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였다. 이와 더불어 집권 후반기라 할 수 있는 567년부터 대중관계도 활발히 진행하였는데 특히 이전과 달리 남조보다도 북조와 더 많은 교류를 가졌다. 북조와의 본격적 교류가 위덕왕대 시작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위덕왕은 백제 역대 왕 중에서 북조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이러한 외교 정책 변화 배경에는 국가 위상 제고뿐만 아니라 한반도 내에서의 고립을 탈피함과 동시에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었다. 정림사 목탑 안에 북조계 소조상을 안치한 목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적 사찰이었던 정림사 목탑에 북조계 소조상을 안치함으로써 남조 일변도정책에서 벗어나 북조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더욱 돈독히 하려는 백제의 의도를 표방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불교를 이용하여 우호적 관계를 표출하려는 대외정책은 이미 남조와의 교류에서 학습된 것이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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