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는 한국고대사 전개과정에서 정치군사문화의 발달측면에서 절대적 역할을 다하였다. 특히 중국대륙이나 한반도가 그 세력을 해외로 확장할 때 예외없이 거쳐야 하는 길목이므로 그에 대한 지배는 동아시아의 세력장악에 관건이 되어 왔다.
서해의 항로는 6세기 초엽까지는 당은포(당항성)-덕물도(덕적도)-초도-패강구-압록강구-비사성-등주로 연결되는 고려·발해항로(소위 노철산수도항로)가 주로 이용되었다. 이 항로는 한무제의 침입 이후, 수·당군의 고구려정벌, 발해의 등주공략, 그리고 검모잠의 남하해로가 됐으며 백제·일본사신도 이 길을 통해 중국을 왕래하였다. 백제의 입장은 고구려연안을 통하지 않는 서해횡단항로의 개척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당은포-초도(또는 백령도)-적산으로 연결되는 수로였으며, 6세기 중엽까지 어느 정도 백제에 의해서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항로는 6세기중엽 이후 신라가 지배하여 이른바 신라항로(소위 적산항로)가 되어 수·당과의 교류가 가능케 되었다.
고구려는 북방항로를 통해 남북조의 대립을 이용했으며 수·당군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백제는 서해에 면하고 있어 국가발전에 있어 절대적인 관련이 있다. 더구나 고구려·신라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서해로의 진출이 필요하였고 백제의 요서경략이 가능한 것이며 독자적인 서해횡단항로의 개척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6세기 중엽 한강유역의 상실 이후 신라에게 서해항로의 주도권을 양도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에 편승하여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수·당과의 적극외교를 추진함으로써 통일은 물론 정치·문화의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통일신라는 당의 수군을 격파함으로써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항로의 확보, 우수한 선박술·항해술에 힘입어 서해를 통해 당과 친선·공존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미증유의 문화발전과 동아의 평화를 건설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서해를 통해 사신·구법승(학문승)·유학생(숙위학생)·상인들이 왕래하였으니, 그중에서 무열왕·문무왕·소성왕·헌덕왕 등 4명의 입당사가 왕이 되었다. 또한 김문왕·김의종 등 9명이 재상이 되었고, 당의 지절사도 귀숭경·위단·원계방 등 당대의 문호였다.
한·중양국은 서해지배권을 위해 부단히 갈등을 계속하였으니, 그것은 동아시아의 주인공이 되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