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으로 볼 때 대전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우술군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비풍군, 고려시대에 회덕현으로 개칭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회덕현은 대체적으로 지금의 대덕구 전역과 동구 일원이었고, 그 외에 서구 일부(삼천동) 및 유성구 일부(전민동)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삼국시대에 백제의 동쪽 변방인 우술군에 속했던 대전지방이 관방의 요충지로 부각된 것은 백제가 외압에 의하여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긴 이후부터라고 하겠다. 웅진 천도 이후 우술군이 신라에서의 최단거리상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책이 강구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백제 멸망이후 백제부흥군이 웅진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그 통로상에 있는 대전지방의 요충지에 군사력을 집중시켜 신라의 군량운송로로 경주를 출발하여 보은을 거쳐 옥천-대전-공주에 이르는 소위 ‘웅진도’를 차단하려 하였던 것에서 나타나며, 이러한 사실은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긴 성왕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관산성(현 옥천)을 공격하다 전사한 사실과, 신라 태종무열왕이 660년 백제 침공시에는 상주 금현성에 머물러 있었고, 침공직후에는 보은 삼년산성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