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답서에 나타나는 소위 「熊津道」는 백제본기나 신구당서 및 자치통감 등 사서에는 ‘신라운량지로’ 등으로 기록되고 있어 신라에서 웅진에 주둔중인 당군에게 군량을 보합하기 위한 통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웅진도를 개통시키기 위한 첫 번째 시도라 볼 수 있는 옹산성전투에는 사비성에 주둔중이던 유인궤군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당군의 합군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웅진의 호위를 알려왔던 당군은 유인궤군임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웅진도의 개통과 관련된 전투가 대전 부근에 분포된 옹산성, 우술성, 진현성, 지라성 등 4성책, 내사지성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웅진도가 보은, 옥천 방면에서 대전-유성을 거쳐 공주에 이르는 통로임을 명백히 밝혀주는 것이라 하겠다.
실로 백제부흥군이 이 웅진도를 차단시키느냐 못하느냐는 부흥운동의 성패와 직결되는 것으로 이의 차단에 실패하였을 때, 백제부흥군의 와해는 시간문제인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