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백제 지명 ‘雨述郡(/城)’, ‘甕山(/城)’과 신라지명 ‘始飴谷停’, ‘沙尸山郡’, ‘態峴停’의 讀法과 위치 비정을 목적으로 하였다. 1.백제지명 ‘雨述郡’은 경덕왕 개정 지명 比豊郡과의 대비로 보아 ‘[pisul] 郡(/城)’의 표기로 보이며 뜻은 ‘벼랑’[崖,厓]으로 보인다. ‘雨述‘의 ’雨‘는 訓讀, ’述‘은 音讀, ’比豊‘의 ’比는‘ 音讀, ’豊‘은 訓讀[숱/술]로 읽는다. 2.’甕山‘(/城)은 심정보 교수가 지적한 대로 ’土石混築‘으로 이루어졌으며 舊회덕읍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連丑洞山城‘이 甕山城으로 보인다. 3.’甕山(/城)‘은 ’雨述(/城)과 서로 다른 성이다. 혹자는 鷄足山城=雨述山城으로 보고 鷄足山城의 백제 때 이름이 甕山城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큰 잘못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세 성이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4.백제 때의 ‘雨述城’과 신라 때의 ‘比豊山’은 표기의 차이뿐이지 읽기는 똑같이 ‘[pisul]mori>moi/mo'였을 것이다. 5.雨述山(백제), 比豊山(신라)의 서쪽 봉우리를 鳳凰山이라고도 하였으나 이는 훨씬 후대의 일로 보인다. 鳳凰山은 대전 시내 중심지에서 북쪽으로 뾰족하게 보이는 산으로 흔히 계족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이다. 백제 신라 시대에는 이 산과 城이 있는 산을 합쳐서 ’[pisul]산‘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6.’[pisul]산‘이 ’鷄足山‘이라고 불리운 고려 이후의 명명은 백제 유민의 이 산에 대한 증오․원한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7.계족산과 기우제 기타 비[雨]와 연결된 설화는 이 산의 옛 이름 雨述山, 比豊山의 [비]와 ’雨‘의 聯合때문으로 보인다. 8.문무왕이 머물렀던 ’始飴谷停‘은 오늘날의 비래동 일대로 비정되는 ’버르시실(停)>비래실‘로 오늘날의 소지명 ’비럭골‘로 보인다. 9.문무왕 원년 8월에 문무왕이 머물고 있던 始飴谷停에서 동년 9월 19일 진주한 ’態峴城(/停)‘은 옛 대덕군 회덕면에 있는 ’곰재‘/’갬재‘로 회덕의 옛 이름이었던 성이다. ’-쟤‘는 ’城‘을 의미하기도 했고 ’山‘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態峴城은 신라 진지왕 4년 2월에 백제가 처음 쌓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문무왕 원년 9월 27일 甕山城을 격파 백제 부흥군의 항복을 받고 나서 쌓았다고 하는 態峴城은 이 전투에서 파괴된 부분이나 불완전한 부분을 修築했다고 보아야 좋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