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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환경

‘임나(任那)’의 지명 비정 일고찰

  • 분류 지리·환경 >
  • 권호수 제5집
  • 저자 서보경
  • 발행일 1997년 4월
  • 게재지 일본역사연구
  • 발행처 일본역사연구회

목차

머리말
1. 연구의 목적
2. 연구의 현황과 분석 방법
I. 임나가야와 그 호칭
II. 반파와 임나
III. 백제의 가야 진출과 임나
IV. 임나의 비정
맺음말

요약

본고는 韓․日 古代史의 쟁점인 ‘任那日本府’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任那’의 地名比定을 그 기본 목표로 하였다. 『日本書紀』에는 ‘任那’가 廣義로 사용되어 加耶 전체를 칭하는 것처럼 기재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日本書紀』의 역사인식이 반영되어 나타난 현상일 뿐 最古의 금석문인 『廣開土大王碑文』이나 중국 측 사료에 의거하면 任那는 원래 특정한 加耶 一國을 칭하는 협의의 명칭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이 협의의 一國인 任那가 한반도 어디를 지칭하는가 하는 데 대한 기존의 해석은 任那는 南部加耶, 加羅는 北部加耶 또는 任那는 金海金官加耶, 加羅는 高靈大加耶라는 식으로 도식화시켜 생각하고 이 설의 유력한 증거로 928년 신라에서 건립한 『眞鏡大師碑文』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眞鏡大師碑文』을 통한 任那=金海金官加耶라는 도식도 별다른 근거를 보유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高靈大加耶가 『日本書紀』繼體條에서 百濟와 대립하는 伴跂國이라는 것의 입증을 통해서 弁辰半路國이 高靈大加耶라고 하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日本書紀』繼體條에서 百濟와 대립해 전쟁상황에 도달하는 伴跂國의 외교노선은 親百濟的인 高靈大加耶의 외교적 성향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伴跂가 高靈加耶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伴跂가 高靈加耶이므로 任那가 金官, 金海加耶라는 說도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한편 『日本書紀』神功 49年(369) ‘加羅七國 平定’을 통해 高靈加耶에 진출한 이래 神功紀 62年(382), 應身記 25年(414) 그리고 顯宗紀 3年(487) 단계까지도 지속적으로 高靈加耶를 중심으로 加耶諸國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繼體紀 7~10年(513~516) 伴跂 즉 星山加耶와 충돌하며 낙동강 중부 이남지역으로 진출하려 한 사실을 통해서도 4C이래 高靈加耶를 기점으로 6C까지도 경상도 방면으로의 진출이 계속되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廣開土王碑文』의 永樂 10年(400)條 高句麗軍이 倭軍을 추격하여 ‘任那加羅’‘까지 이르렀다는 기사에 의거할 때 추격지점이 ’任那加羅‘라는 사실은 倭가 ’任那加羅‘를 對高句麗戰의 전진기지로 倭에게 제공한 것은 百濟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편 百濟가 369年이래 일관되게 加耶경영의 근거지로 하고 있던 곳이 高靈加耶였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對高句麗戰의 전진기지로 백제가 倭에게 ’任那加羅‘ 역시 高靈加耶임을 알 수 있었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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