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은 백제말기 일시 수도였으며 그 근거로는 현재 왕궁지에서 발견되는 상부대관 관궁사찰의 명문와당과 일부건물지의 유지에서 왕궁 경영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문헌적 사료로서는 관세음응험기의 분명한 천도사실이 있고 왕궁내 조영된 사원이 대관사였다고 하는 논증은 백제의 익산 천도 가능성을 더욱 확실히 해준다.
당시 백제가 익산지방에 천도 할만한 요건은 한강 유역에서 금강유역으로 정치적 중심지를 옮긴 이후 백제의 정치적 기반은 마한계통의 한족이었으며 한족의 전통적 터전이 익산이었다. 또한 익산지방은 오랫동안 군사적 혹은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해온 지역이란데 관심을 돌려 이 지방에 정치적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새로운 중흥을 기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익산천도의 경영은 왕권을 강화하고 율령제도를 한층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그 방법으로 불교의 발전을 기하여 한편으로는 불교로 국민정신을 통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규모의 불사를 경영하여 이로서 국왕의 존엄성을 높이려 하였던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익산천도와 더불어 전개된 백제문화는 불교문화를 이루고 이를 그 후에 일본에까지 전한 것으로 믿어진다. 끝으로 주목하여야 할 것은 당시 불교신앙은 미륵신앙이 우세하였고 이는 미륵신앙이 갖는 지계주의의 강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의 새로운 중흥을 기하려는 국민적 기대에 백제왕실의 입장은 이를 육성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한 것이 아닌가 한다.
미륵사의 경영은 그를 말하여 주는 것이며 대관사는 미륵사 경영을 위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