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초기 국호는 위례홀국이었다. 위례홀에 관한 어원과 어의를 백제 왕칭어인 어라하에서 찾으려는 노력과 현대국어 ‘우리’에서 결부시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졸고에서는 위례성을 미추홀과 더불어 지명으로 보려 하였다. 城과 忽이 대응되어 옛날에는 위례성도 위례홀로 불렀을 것으로 보아 ‘忽’이 접미한 것은 지명일 수 밖에 없다는 논거를 忽접미 지명에서 찾았다. 온조족이 처음 당도하여 정착한 곳이 위례홀이었고 최초 정착지명을 그대로 국호로 삼은 것이다. 위례는 한강에 대한 옛이름인 아리의 계승명으로 추정된다.
십제와 백제는 동명이기로 볼 수 있다. 온조와 은조의 동일어로 ‘十·白’의 옛새김은 on으로 보고 濟=祚를 음차로 보아 모두 onco의 이표기형으로 추정된다. 국내사서보다 앞선 중국문헌의 기록연대로 보아 伯濟가 百濟보다 이른 시기 존재이고 그곳이 온조왕의 초기 이도지이며 서로 음상이 동일하다는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무관하였을 것이 논증된다. 무관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절대적 근거는 伯濟는 음독명인데 반해 백제는 ‘百’만 석독하여 onco로 해독하는데 있다.
무릇 신라 국호가 사로, 사라, 서라, 서벌, 서라벌, 계림, 시림 등 다양하게 변형했지만 모두 그 뿌리를 굳건히 지키는 범위내에서의 표기변화였다. 고구려 국호도 고구려, 구려, 하구려, 구고려 등 여러 모로 변형했지만 본바탕을 벗어난 변화는 아니었다. 백제가 고구려, 신라와 다르게 국호변화가 있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보편성을 바탕으로 온조, 은조, 십제, 백제, 응준 등 동일 근간 혹은 동일어인 국호를 다르게 표기 변형한 것이라 보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