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의 後期語의 특징은 馬韓語를 계승 발전시킨 土着語에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 중의 하나가 地名語尾 ‘一夫里’이다. 이것은 馬韓語의 ‘一卑難’를 물려받은 확실한 존재이다. 그리고 비록 古代 日本의 문헌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지만 王位號인 鞬吉支의 ‘吉支’가 ‘キシ’로 거의 末期까지 쓰였다는 점도 도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百濟의 後期語로 島를 ‘斯麻’라 하였고 僧을 ‘沙門’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官職 중에서 大輔, 左輔, 右輔의 ‘輔’를 新羅語인 居柒夫, 異斯夫 등의 ‘夫 ’와 동질적인 語素로 보았고, ‘大輔’를 ‘한보-한부’로 불렀을 것이라면 ‘左輔’와 ‘右輔’의 ‘左右’도 고유어로 불렀을 것인데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左平’만 있고 ‘右平’이 없다. 新羅가 역시 ‘舒弗邯’만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여러 가지의 論據를 들어 佐平을 ‘uspər~sʌypər'로 추정 하였다. 新羅는 後代로 내려오면서 ’角干>大角干>太大角‘과 같은 최고 관직의 昇次位를 표시하기 위하여 ’大, 太‘를 접두하여 불렀다. 百濟 역시 後期語에서 ’上佐平, 大佐平‘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고유어로 불렀다면 아마도 ’hanuspər~hansʌyər' 이었을 것이다. 또한 '上佐平中左平下左平‘으로 3등분하여 位階를 細分하였음도 이채롭다. 이 경우에 ’上․中․下‘를 고유어로 어떻게 불렀을 것인가의 의문이 제기된다. 百濟의 王姓은 扶餘氏이었다. 그러나 제 17대 阿莘王代에 와서야 비로 王姓이 기록상에 나타난다. 그것도 중국 문헌에 ’餘暉‘이라 표기되어 있을 뿐 이다. 이보다 이른 시기에 동일한 姓氏을 사용하였던 것인가 아니면 溫祚王이 高朱蒙王의 아들이니 혹여 高氏를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가 ’源出扶餘‘라 하여 扶餘國王이 姓氏인 解氏를 제 3대 王부터 사용한 것처럼 解氏로 불리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百濟語에서는 姓名을 줄이어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王姓인 扶餘를 ’餘‘혹은 ’扶‘로 표기 하였고 王名도 2字를 單字로 줄이어 불렀다. 물론 표기상에서 확인되는 생략형이라서 口語로 호칭한 때도 그렇게 줄일 수 있었는지 일단 의심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줄이어 부를 수 없는데 표기만 줄여서 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백성의 姓名도 동일한 방법으로 적고 불렀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게 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