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는 남북조가 서로 독특히 다른 색을 띠었는데 북조 문화를 받아들인 고구려는 행정, 군사면에서 크게 발전을 이루었고 문학에서 남조풍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백제는 남조를 받아들여 남조 문학을 숭상했고 능묘, 사찰 유적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통해서도 남조문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의 문화를 수용한 가운데 백제는 6좌평을 설치하고 이는 중국의 6부와 상응하는 것으로 한문화를 깊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또 관직에 좌평, 솔, 덕 등의 명칭이나 지방행정구획 등이 모두 한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또 성왕이 시법을 제정한 것 역시 한문문화의 유입 중의 하나이다.
근초고왕대 박사 고흥에 의한 서기 편찬은 백제가 문장을 기술할 수 있게 된 것인데 이 때 중국에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사에서 외교문서를 보낸 것과 비교할 때 이 기사는 믿음직하다.
신라가 한문 유입에 있어서 경전보다 유교의 학술을 먼저 받아들인 것과 달리 백제는 경전을 먼저 수용하였고 양대에는 모시박사, 주례박사를 채용했고 일본에 전수할 때도 여러 사람의 오경박사를 교대로 파견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일본사와 무관한 백제 기사만 기술되거나 백제, 임나, 신라 등 관련 있는 기사 등의 유려한 문장은 백인의 기록을 그대로 옮겼던가 백제인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당시 백제의 한문문화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령왕릉 매지권과 사택지적비를 보면 전자는 남조서법의 영향이 짙고 후자는 북조 영향이 짙은데 따라서 백제 말기 수당 문화가 유입된 것을 알 수 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