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 共時的인 記述로 말미암아 그 역사성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그 표본이 되는 사례가 곧 百濟 前記時代의 版圖內에 분포하였던 地名語의 본적과 현주소의 관계이다. 실로 어떤 歷史的인 사실이 記述者 의 의도적인 共時的 記述이란 베일에 덮이어 숨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 그러나 皮相的 관찰에서 머물고 말지 않는 통찰의 慈眼은 결국 덮인 베일을 벗기고 통시성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기 마련이다. 三國統一을 한 것처럼 前提하고 統一三國 중 가장 넓은 영토로 설정한 三國史記 地理2의 이른바 高句麗의 영역은 高句麗의 本土가 아니라 서기 475년에 長壽王이 남침하여 占有한 百濟의 영역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占領期(약 1세기 내외)의 高句麗 영역이었을 뿐이다. 만일 이 占有期에 그 以前의 역사적 사실이 高句麗의 역사성으로 置換될 수 있다면 이 지역을 北進으로 탈취한 新羅의 占有期間(약 1세기 남짓)에는 新羅의 역사성으로 再置換될 수도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占領期에 나름대로 새로 창조된 사실만은 그 시기의 몫으로 배당할 수 있지만 그 以前의 역사적 산물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창조된 이전 시기의 것임에 틀림없다. 참으로 地名은 保守力이 가장 强靭한 존재이다. 그것은 語彙들 중에서 변화를 가장 싫어하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高句麗거 强占하기 前에 百濟의 故領에 존재하였던 모든 地名은 곧 百濟語에 해당한다. 물론 점유기에 새로 지은 地名이나 개정한 新生 地名이 있다면 그것만은 틀림없는 高句麗의 것이다. 또한 新羅가 다음으로 이 지역을 점유하고 새로 지었거나 개명한 지명이 있었다면 그것들은 또한 新羅地名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이 두 나라가 점령한 시기의 新生 혹은 變更 地名을 제외한 묵은 地名은 百濟가 公州로 遷都하기 以前의 百濟 地名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