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II. 벼농사 문화인의 도래
III. 가야인들의 도래
IV. 백제 유민의 도래
V. 맺음말을 대신하여
요약
고대 동아시아에서 일본열도의 구주 지역으로 다수의 유민이 발생한 경우는, 첫째 일본열도에 벼농사를 전래한 이른바 야요이인의 이주, 둘째로는 5세기를 중심으로 한 가야인들의 도래, 셋째로는 7세기 중엽의 백제인들의 망명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다수의 유민이 발생하는 직접적인 이유로는 크게 전쟁과 기근을 들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전쟁과 기근의 배경으로는 기후변동이라는 자연환경의 변화를 지적할 수 있다. 야요이인의 이주의 경우, 중국 대륙에서 주가 건국된 이후의 정치적 변동, 특히 전국시대의 격렬한 동요가 한반도를 비롯한 주변지역에 영향을 미쳤고, 그러한 영향의 여파로 벼농사인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 특히 구주지역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5세기를 중심으로 한 가야계 유민의 도래 역시, 5세기의 기후변동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5세기는 기후가 한랭한 시기였고, 한반도에서 한발, 누리, 기근 등이 빈번하였다. 삼국 간의 항쟁이나 왜의 신라 침입이 빈번하였던 것도 고분한랭기라고 불리는 5세기의 기후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야계 유민들은 須惠器의 祖形인 도질토기 및 제철 기술을 전래하였고, 온돌이나 화덕과 같은 유구를 남겼다. 백제인의 망명은 백강구전투를 치르고 난 663년 이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구주지역에 백제인들이 거주한 사례는 보이지 않으나, 近江國이나 武藏國 등에 다수의 백제인이 거주하게 되었다. 또한 왜의 조정 내에서 활동한 백제 관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한반도에 일본열도로 건너올 때, 우선 구주지역에 상륙하였을 것이다. 한편 왜는 신라와 당의 침공을 예상하고, 대마도를 비롯하여 구주 및 세토 내해를 따라서 산성을 축조하였는데, 이 또한 백제인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