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백제 금동신발의 시기구분과 특징
1. 출토유물 분석
2. 문양의 변화와 시기 구분
Ⅲ. 금동신발과 지방세력 통제
1. 금동신발과 의관제
2. 금동신발의 제작 주체
3. 금동신발의 사여와 지방세려 통제
Ⅳ. 지방통치의 강화와 금동신발의 소멸
Ⅴ. 맺음말
요약
본 연구에서는 금동신발이라는 특수한 유물이 4~6세기라는 특정한 시기에 지방사회에 집중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주목하여 이 시기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사료의 하나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금동신발은 금동관과 더불어 중국에서는 문헌상이나 고고학 자료로도 보이지 않는 특수한 것으로, 한반도와 왜에서만 등장하는 것이었다. 특히 백제의 금동신발은 그 형태 및 문양 등 외형적 모습에서 고구려·신라·왜에 비해 매우 다양하며, 시기에 따른 변화 양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현재 가장 이른 시기의 출토품은 4세기 말경의 원주 법천리 4호분의 것이며, 가장 늦은 것은 6세기 초중반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다. 백제의 금동신발은 특히 문양을 중심으로 시기별로 변화를 보이는데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한성시기에 해당하며, 주된 기본단위 문양은 금동신발의 측판의 ‘凹’자문양이다. 제3기는 5세기말에서 6세기 초중반에 해당하며 주된 기본단위 문양은 귀갑문이다. 또한 주변국의 금동신발과 비교분석을 통하여 백제 금동신발만이 가진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금동신발은 기본적으로 복식에 속하는데, 고대사회에서 복식이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따른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왕은 服制에 걸맞은 정장과 의관을 관료들에게 하사하여 분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복과 함께 하사된 금동신발을 실제로 신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의관제의 하나로서 복식을 사여 받았을 당시에 의례용으로 받았을 가능성이 높고 훗날 부장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백제 금동신발은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고 중국에서 입수했을 가능성보다는 국내, 특히 왕실의 공방에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금동신발의 최초 제작 시기는 금동관이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로 추정되는 비류왕대를 전후한 시기로 비정할 수 있는 바, 이는 금동관의 제작과 유통이 백제의 지방통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백제는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대부터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담로와 같은 지방통치조직을 만들어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금동신발 중 과반수가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며, 지역적으로는 원주, 공주, 고흥, 고창, 서산 등으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바, 금동신발은 이 시기의 지방통치 편제와 동시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후 개로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공격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갑작스러운 웅진 천도 등으로 백제의 지배질서는 매우 붕괴되었으며, 이로 인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상대적으로 느슨해졌다. 이에 따라 백제 왕실에서는 중앙 및 지방의 유력귀족들에게 왕·후의 작호를 사여하고, 금동신발을 비롯한 금동관·장식대도 등의 최고급 위세품을 하사하여 재지세력을 관등체제에 편성하려고 하였다. 나주, 익상 등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이 시기 지방통치제도의 변화 양상과 관련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이후 동성왕·무령왕대의 정책 추진으로 왕권의 안정화와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강화되어 성왕대에는 방·군·성제의 실시로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다. 또한 무령왕대부터 南朝와의 교류가 빈번해져 기존의 전통적 질서에도 변화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무령왕대를 마지막으로 금동관은 금제관식이나 은제관식으로 바뀌었고, 금동신발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즉 백제의 금동신발은 지방통치제도의 편제기에 활발히 나타났다가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