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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4~5세기 남부가야제국과 백제의 교섭 추이

  • 분류 문헌 > 정치·외교
  • 권호수 제65집
  • 저자 김량훈
  • 발행일 2007년 12월
  • 게재지 역사와 경계
  • 발행처 경남사학회

목차

I. 머리말
II. 4세기 중반 남부가야제국과 백제의 외교관계 성립
III. 5세기대 남부가야제국과 백제의 교섭 양상
1. 고구려남정기 군사·외교관계 강화
2. '나제동맹' 성립기 사회·경제적 교류 확대
IV. 남부가야제국과 백제권역의 교섭 성격
V. 맺음말

요약

4~5세기 삼국과 가야의 정치적 상황과 남부가야제국과 백제권역에서 출토된 고고자료를 검토하여 남부가야제국과 백제의 교섭을 살펴보았다.
4세기 중․후반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남부가야제국과 백제는 고구려․신라에 대처하기 위해 상호 협력적 외교관계를 맺었다. 즉,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선진문믈을 매개로 남부가야제국과 교섭을 추진하였고, 남부가야제국은 신라를 견제하고 선진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특히, 고구려 남정기 남부가야제국과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더욱 긴밀하게 외교․군사적으로 협력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남부가야제국에 협조를 요청하였고, 이에 남부가야제국은 선박 등 군수물자를 지원하였음은 물론 전쟁에도 직접 참전하였다.
이후 5세기 중반 ‘羅濟同盟’의 성립으로 남부가야제국과 백제의 군사․외교적 관계는 이전보다 약화된다. 특히 백제의 친신라정책과 곤지의 渡倭로 이들 간의 교섭은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이유로 동북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남부가야제국의 독자적인 외교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4~5세기 남부가야제국과 백제 간의 교섭을 주도한 세력을 통해 이들 간의 교섭 성격을 살펴보았다. 특히 4세기 후반 남부가야제국의 가락국과 백제는 각각의 교섭권을 확대한 후 교섭체계를 단일화시켰다. 즉, 가락국은 기존의 교섭 창구인 김해만과 새로이 진해․마산만 등으로 교섭창구를 확대한 후 탁순국(창원)을 통해 백제와 교섭을 행하였고, 백제는 금강유역권 정치체를 통해 남부가야제국과 교섭을 수행한 후,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중앙 관료를 파견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5세기 중반 이후 남부가야제국과 백제에서 대외 이주한 세력이 사회․경제적 교류를 활성화시켰다고 생각된다. 이는 백제인들의 대외이주 기사와 서부경남식․영산강유역계 토기의 성립 배경(토기 제작 기술의 전파)과 유공광구소호․조족문호의 성격(토기의 특수성․지역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볼 때, 4~5세기 남부가야제국과 백제는 동북아시아 외교정세 변화에 따라 이들 간의 교섭목적과 교섭 주도세력이 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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