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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지1
사찰에서는 중심 구역 주변에 공방을 두어 사찰이나 기타 지역에 필요한 생산도구, 공예품 등을 만들어 사용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이나 부여 능산리사지에서도 백제시대 공방지가 발견되었다. 미륵사지 공방지대장간는 통일신라시대 여러 가지 철제품을 만들던 곳으로 서원 승방지 서쪽에 있다. 공방지의 크기는 동서 15m, 남북 11m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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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건물지
고려시대 건물지는 미륵사지 전 구역에서 발굴되었다. 대부분 크지 않은 규모로 고려시대 내내 많은 건물들이 공존했던 것은 아니고 시기에 따라 건물이 건립되고 위치가 변화되었다. 그 중 서원 금당지와 주변 지역은 막새기와와 명문기와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를 통해 고려시대 초기부터 말기까지 여러 차례 고쳐 지으면서 금당 등의 중심 기능을 이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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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건물지
조선시대 건물 터는 백제시대의 미륵사 중심 구역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발굴 전부터 법당 밭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고려 초기부터 이 지역에 건물이 지어졌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 보다 절의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조선시대 건물지의 배치는 남쪽에 중문지가 있고, 북편 중앙에 서탑국보 제11호을 향한 금당지가 있다. 금당지 앞마당에는 석등이 1기가 있고, 금당지 좌 · 우측에는 건물지가 각각 2개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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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승방지
승방은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북승방지는 강당지 북편 석축 위에 자리하며, 미륵사지에서 단일 건물지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초기 건물지는 동서 길이 133.4m, 폭은 14m이고, 내부에는 한 변 6m 크기의 방 두 개가 동서로 한 조를 이루며 8조가 있다. 승방은 사찰의 바깥쪽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고, 방을 중심으로 사찰 내측과 외측에 복도와 같은 공간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동·서원 승방지의 구조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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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지
강당은 여러 사람이 모여 불경을 강의하고 설법하며, 법회와 같은 불교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강당지는 중원 목탑과 금당지를 지나는 남북 중심축을 그렸을 때 금당지 북쪽에 있다. 강당지의 동서 양쪽에는 동·서승방지에 연결되는 접랑지接廊址가 있고, 강당지의 북쪽 석축 위에는 북승방지가 있다. 북쪽 중앙에는 북승방지로 연결되는 복도시설의 기초석 6매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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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승방지
승방은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미륵사지에는 동원과 서원의 북회랑지에 연결된 승방지 2개소와, 강당지 북편에 승방지 1개소가 있다. 동원과 서원 승방지는 길이 65m, 폭 14m이고, 내부에는 한 변의 크기가 6m인 방 두 개가 남북으로 한 조를 이루며 4조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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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하대석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고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사찰의 금당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사이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미륵사지 석등은 동원과 중원의 금당지 남쪽에 각각 1개씩 하대석만 남아 있으나 서원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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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지
금당은 불상을 모신 건물로 탑과 더불어 사찰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건물이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연못을 메우고 탑과 더불어 금당을 세 곳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삼원의 가람 속에 각각 금당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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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구층석탑
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하여 그 기단의 규모와 형태 및 출토 유물을 조사한 결과, 서탑 국보 제11호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원 구층 석탑은 동원 탑지에서 출토된 기단석, 옥개석, 노반석 등의 탑 부재와 현재 남아 있는 서탑 등을 통해 고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1년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