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의 묘지명으로부터 비롯되었던 흑치라는 지명의 위치 비정과 이와 관련된 몇 가지의 사실들을 살펴보았다.
흑치상지의 성씨인 흑치씨는 본래 왕족의 성씨였던 부여씨였다. 그런데 흑치라는 지역에 분봉되었던 관계로 그의 성을 흑치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흑치란 오늘날의 예산 덕산지방의 今勿이라고 하였던 백제어의 지방이름을 중국인들이 한자화하여 기록하는 과정에서 黑齒로 기록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흑치란 바로 오늘날 예산의 덕산지역을 지칭하고 있음을 살폈다. 그리고 이 흑치씨으 세력 근거지는 바로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오늘날 예산에 위치하는 임존성이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흑치상지는 이곳이 바로 그의 세력근거지였기 때문에 빠른 시일내에 부흥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며, 쉽게 짧은 기간 내에 3만의 부흥군을 모집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한 아아러니 하게도 백제 부흥운동의 마지막 중심지였던 임존성은 다시 흑치상지에 의하여 함락당하게 되는데 당군에 의하여 함락되지 않았던 임존성이 이때 이처럼 흑치상지가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지역을 흑치상지가 너무 잘 알고 있었으며, 그를 공격하는 상대가 흑치상지였다는 점에서 부흥군들의 동요 또한 그의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흑치씨가 이처럼 오늘날의 예산 덕산 지역에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이 지역이 역사지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성왕대 직후부터이었다고 이해하였다. 그후 이 지역은 임존성을 중심으로 하는 흑치가에 의하여 지배되던 지역이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