眉叟許穆은 그 세가에서 贊해 말하기를 “백제는 溫祚王으로부터 强硬하게 싸워서 나라를 세워 富國强兵하는데만 힘썼다. 비록 나라를 장구히 6-7백년 누리었으나 强暴한 나라일수록 후세에 남길 유품과 善俗이 없다. 國君으로서 強戰하여 죽이고 죽고 한 것이 네 임금이나 하였으니 이 또한 나라를 가진자의 경계할 점이다.”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문화수준이 높아서 일본에까지 영향을 준 나라일 뿐 아니라 유․불․도 3敎의 수준이 높은 교화사업이 성행하였음을 日本書紀를 통하여도 알 수 있다. 특히 부여에서 발굴된 향로의 구조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와 같이 정교하고 폭넓은 세계관, 자연관, 오행관, 유불선 포용관 神人以和로 百獸率舞한상 句陣이 手羽鱗甲之蟲을 통솔하는 상 天皇大帝와 그리고 華蓋의 상 五帝神 등을 표현한 형상이라고 볼 때 앞서가는 남부여국인 백제나라는 숭문정신의 최고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백제의 숭문정신은 고구려의 숭무정신과 신라의 화랑도정신에 보다 앞설수 있다는 것을 五經博士제도에서나 이 향로로써 입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백제 말왕 依地왕이 荒淫無禮하다고 후세 기록이 있지만 그것은 나라를 잃은 까닭에 혹평하는 것은 그릇된 기록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의자왕은 공자의 제자 曾子와 같은 효자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百濟史를 재고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는 바이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