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백제의 불교와 사리신앙 수용
Ⅲ. 夫餘 陵山里寺址 출토 百濟昌王銘舍利龕
Ⅳ. 백제 사리장엄의 예
Ⅴ. 백제 사리장엄구에 대한 검토
Ⅵ. 맺음말
요약
백제의 사리장엄은 목탑의 경우, 봉안 장소에 따라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었다. 제1기는 사리장엄의 가장 오랜 방식이 쓰이던 시기로, 능산리사지 목탑과 사리감의 예처럼 탑심초석을 지하 깊이에 놓고 이 심초석과 별도로 석함을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다. 제2기에는 지하에 놓인 심초석과 사리석함을 결합한 형태, 즉 심초석에 직접 사리공을 뚫어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그 시작은 일본 비조사 사리장엄으로 보아 그 시작이 6세기 말에 해당되었다. 제3기는 이러한 사리공이 있는 지하심초가 지상심초로 바뀌는 시기이다. 이는 무왕대에 미륵사라는 대규모의 국찰을 건립하면서 새로운 건축술로서 목탑의 심초가 기단부의 윗면에 놓이는 지상심초가 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목탑과 달리 정림사 오층탑과 같은 석탑의 경우 사리안치장소가 탑신부로 확대됨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사리기로는 수정이나 유리병에 사리를 담이 금-은-동 또는 목칠함에 여러 번 겹쳐 넣는 방식이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백제가 삼국시대에 석조미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이나, 사리장엄 또한 백제의 역할은 지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사리장엄도 그 연원은 백제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백제의 사리장엄에 대한 고찰은 이제까지 백제의 실례가 없어 통일신라 시대를 중심으로 알려져 있던 사리봉안방법을 바탕으로 소급, 추정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최근의 창왕명사리감의 발견으로 백제의 사리장엄에 대한 보다 새로운 이해가 이루어 지길 바라며, 더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기를 기대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