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政臺의 현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扶餘郡 窺巖面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政事巖의 고사는 부족사회시대부터 전승되고 있는 민주방식에 의한 부족회의 한 유제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와같은 부족회의 형식으로 투표에 의하여 공정하게 재상을 선출하는 방식이 어느시대까지 계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대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지고 官司制에 의한 직제의 기록이 보인 古尔王(234~286)때 南堂이라는 중앙정청의 기구가 생기어 왕이 이곳에서 群臣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친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남당정사의 시작은 한문화수용과 집권체제가 앞섰던 백제에서 신라보다는 이른 시기에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에서는 최상의 지배족단인 대성팔족이 남천을 전후한 서기 5세기 후반부터 실시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 대성팔족의 권력서열에는 변화가 인정되나 文周王이 병관좌평 解仇에게 시해되고, 東城王이 佐平 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는 등 대성귀족으로부터 한동안 왕권이 위협을 받을 정도로 그들 상위귀족세가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재상선출의 장소가 사비성시대인 부여지방에 政事巖 또는 天政臺로 전해오고 있으나 이는 신라의 화백과 같이 백제 역시 북쪽의 부여나 고구려사회에서 전승되어 한강변에서 토착 부족집단과의 규합 또는 남쪽 마한의 정복을 통하여 그들과의 연맹체제를 갖추어가는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합의적 회의형태의 유재라고 볼 수가 있다. 백제의 政事巖인 天政臺란 하늘을 제사지낸 3한 부족사회의 소도의 맥을 이어 제정일치시대의 유풍으로 역시 하늘의 뜻으로 정사를 의논하였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가 있고, 신라 화백의 4영지가 聖地였던 것처럼 백제의 天政臺도 신성한 장소를 택하여 의사 결정을 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