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일본의 파병준비
1. 백제 지원군의 편성
2. 본향에로의 귀소적 참전
3. 《일본서기》소재의 '구군전패'의 징후
III. 맺음말
요약
일본이 파견한 백제 구원군의 성격을 귀소적 관계에서 살펴보았다. 그들의 파병을 귀소적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사료적 바탕에는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앞서 말한 本鄕, 先墓, ‘救軍敗績’의 암시 등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구원군의 파병준비에서 무기와 식량을 먼저 보냈다는 사실은 경직된 종속관계에서 해석될 일이 아니고 오히려 백제 부흥군의 짜여진 계획대로 마치 分國의 자원을 빼내간 것처럼 추진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백제 부흥군이 식량조달이 용이하지 아니한 천연요새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병력보다는 무기․식량의 비축이 긴요했을 것이다. 정말 일본이 백제의 上國(후견국)이었다면 兵力을 더 많이 보내려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唐初 중국과 돌궐사이에 맺어진 군사 약정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때 돌궐은 중국에 대해 기마보다 병사를 더 많이 보내려 하였고, 唐은 병사보다 騎馬를 더 많이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고대한일관계사를 하나로 묶는 연결끈은 도래인 세계이다. 이들 세계의 활동은 7세기 중엽을 고비로 점차 조국과 멀어져 갔다. 이것을 離巢性的 행위 즉 신라에 대한 방위체제를 굳건히 갖추면서 구백제의 고토와 멀어지게 된 것이다. 백제의 잃어버린 왕국으로서 알려져 있는 近江王朝가 멸망할 때까지는 도래인의 활동이 母國과 分國을 이어 갔다. 도래인의 활동과 역할이 가장 극성하였던 시기는 바로 백강구전이 일어난 때이다. 이 관계 때문에 구원군이 패망할 것이라는 동요가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이 동요 속에 배제부흥의 최후 보루였던 俱例城이 보이는 것도 우연으로만 돌릴 수가 없다. 그것은 백제계 도래인을 통해서 이어지는 그들 본국과의 끈끈한 연결끈이다. 신라계 이주민들은 이것을 비럭질(比邏矩)로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의 비가 올 것이라고 경계하였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