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흑치상지 묘지명 발굴의 의의
III. 『위지』로 본 흑치국의 방위
1. '흑치국'은 실제(實在)하였는가?
2. 『삼국지·위서』동이전·왜조로 본 흑치국의 방위
IV. 『백제향』의 장족은 흑치족의 후예
V. 『백제향』은 『진평군 진평현』의 치소?
1. 『진평현』의 치소는 『백제향』에 있었다
2. 『백제향』은 흑치상지의 고향
VI. 맺음말 - 흑치국은 어디인가
요약
당시(晉代)의 ‘黑齒國’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를 자세히 말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魏志』에 의하면 ‘黑齒國’은 裸國과 접한다는 것으로 보아, 그 西界는 지금의 월남 중북부 지역이 분명하나, 그 東界가 어디까지 인지는 자세히 알 수 가 없다. 아마 지금의 廣西 百濟鄕 지역을 넘어 더 먼 동쪽으로 가야 되지 않나 생각 된다. 이점에 대해 晉代의 史書 『文遷』에 의하면, 당시 吳나라가 관할하는 지역으로 「烏滸, 狼荒, 夫南, 西屠, 儋耳, 黑齒之酋, 金鄰,象郡之渠」등 7나라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象郡」내의 「걸출」로 알려진 나라들이다. 그런데 그중 ‘黑齒國’은 儋耳와 金鄰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黑齒國’의 東界는 지금의 海南島북부연안 지대인 廣西와 廣東의 경계지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黑齒國의 영역은 꾀 큰 것으로 보이며, 百濟鄕지역은 黑齒國의 요충지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오늘의 百濟鄕지역을宋書에 기록된 「百濟郡」의 治所와 관련지어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1980년대 후반에 와서 알게 된 黑齒常之의 墓誌銘에 따르면 百濟는 6세기 중엽에 이 땅에 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사실을 입증이나 하듯 오늘날 廣西百濟鄕에는 ‘百濟’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百濟가 무슨 까닭으로 이 먼 곳에까지 왔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는 없지만 그곳의 주민들은 아직도 고장의 이름 ‘百濟’를 부를 때 이를 「大百濟」라는 우리말 발음을 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들은 글자에도 없는 발음을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이 지역에는 장시간에 걸처 「大百濟」의 治所인 「百濟郡」과 같은 ‘기관’이 존재하였다는 산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그러한 언어는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들이 옛 百濟(大百濟)의 ‘참모습’을 상기하고 그것을 반복하는데서 생기는 일종의 ‘습관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百濟가 이 지역에서 「大百濟」의 기치를 높이 들고 그 ‘위용’을 떨친 위대한 ‘해양국가’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