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加耶勢力의 自救勞力 및 百濟와의 분쟁
3. ‘任那再建’의 의미
4. 高句麗-安羅의 通謀
5. 맺음말
요약
가야는 5세기 후반 백제가 위축된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는 등 세력을 재정비했을 뿐 아니라 백제와도 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뿐 가야세력은 오래 가지 않아 백제․신라 등 주변세력의 압력을 받아 위축되기 시작하고 급기야 일부 가야소국은 신라에 투항하고 나머지 가야제국도 ‘임나재건’을 앞세워 압력을 넣어 오던 백제의 부용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때에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 소위 ‘임나재건’문제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에 이룩한 바 있던 백제․가야․왜 동맹체제를 다시 한 번 이루어보자는 의도로 풀이했다. 백제는 이런 식으로 한반도 남부에 자국 중심의 질서를 확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가야를 비롯하여 신라․왜의 비협조로 그 자체가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생각되나 백제가 가야세력 상당부분을 세력권에 넣는 데는 차질이 없었다고 보인다. 이 과정에서 안라 등 일부 가야소국의 저항이 있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기본적으로 백제에서 벗어나려는 가야의 노력과 가야를 세력권에 넣어 두려는 백제의 의도가 충돌하면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결국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의 가야사는 이러한 기본적인 흐름 속에서 신라․왜 등 주변세력의 변수가 작용하는 형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아서는 가야의 백제 종속이 어떠한 형태이건 ‘자발적인’ 것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가야가 신라세력의 팽창 때문에 백제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보는 기존설과는 달리 가야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하다가 실패하여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했던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5세기 후반~6세기 초의 가야사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면 4세기 이후의 가야사도 4세기 중엽 백제․가야․왜 동맹체제 성립과 5세기 초의 해체에 이은 5세기 후반~6세기 초의 체제재건 시도라는 흐름 속에서 복원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즉 가야사가 4세기 이래의 연속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