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시조 문제에 있어서 백제는 시조나 건국 과정이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어 기록에 따라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백제가 단일 집단에 의해서 건국된 것이 아니라 여러 소국을 통합하여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동명을 시조로 하는 기록은, 부여족 사회에서 공통적인 시조신으로 숭배하는 동명을 건국 집단이 그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정통성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구태는 대방고지에서 건국한 백제의 원류가 되는 소국의 시조이었다. 그리고 비류는 구태의 후예로 졸본부여에서 남하하여 미추홀에서 나라를 건설한 소국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비류보다는 구태를 시조로 섬겨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고, 비류는 그 후예이므로 굳이 시조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온조는 비류 집단보다 늦게 졸본부여에서 유리 집단과의 갈등으로 남하하여 위례에서 소국을 세운 시조이다. 이렇게 소국을 건설하였던 집단들이 가지고 있었던 시조 전승이 전해져서 여러 문헌에 불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건국 시조에 따른 건국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仇台가 나라를 세웠다는 帶方의 실체는 크게 낙랑군 속현에서 나뉘어진 대방군과 별개의 대방국으로 나타난다. 구태가 건국했다고 전하여지는 대방이 비정하는 장소에 따라서 중국의 요녕지방일 수도 있으며, 황해도 재령평야, 임진강 유역일 수도 있다. 이중에서 필자는 대방의 위치를 중국의 요녕지방으로 보았다. 다음으로 비류 집단은 온조 집단과는 별개로 이들은 졸본부여에서 남하하였는데 해안선을 따라 浿水(예성강)와 帶水(임진강)를 건너서 彌鄒忽에 정착하였다. 그런데 이 미추홀은 크게는 京畿의 仁州와 牙山의 密頭里로 보고 있으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경기의 인천이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한편 卒本 地域을 떠난 온조 집단은 내륙 지역을 통하여 이동하다가 위례 지역에서 마한 세력의 양해로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을 중랑천 일대로 본다. 온조집단은 이곳에서 小國을 형성한 뒤 세력을 키워 주변 선주 토착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미추홀 세력을 비롯한 주변 집단과 연맹 관계를 맺었다. 그 후 백제는 주변 소국들 사이에서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했으며, 차츰 주변 지역을 아울러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백제라는 고대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