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남북조시대는 백제와 고구려가 요서지방에 진출한 好機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북조시대 중국 축의 諸 사료는 남천 이후의 백제를 강국으로 기록하고 있고, 『三國史記』百濟本紀는 남천 이전의 백제가 강국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후자에 따르면 369년 이전에는 고구려의 백제 침공이 없는 터에 東明王이 백제의 시조로서 굳어졌던 점 등으로 보면 백제의 北界가 浿河(예성강)이었던 溫祚王 재위기간은 백제의 요서진출에 호기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는 백제의 요서진출을 346년 이전으로 보고 있는 鄭寅普의 설과 부합되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요서진출은 385년에 있었던 고구려의 요동점령보다 앞서는 셈이다. 後燕이 차지했다가 그 멸망으로 백제가 다시 영유했으며(436) 그 이후 백제가 계속 이를 영유한 것은 478년 백제와 勿吉이 연합하여 고구려의 요동 10落을 뺏은 바 있음을 물길 사신 乙力支가 北魏에 알린 것으로 보아 이는 요서의 백제라고 보는 것이다. 백제는 영유한 遼西郡과 晉平郡에 百濟郡을 두었다고 『梁書』百濟伝은 언급하고 있다. 특히 백제가 百濟郡을 두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영유한 요서 땅에 백제의 행정적 통치력이 지속적으로 미쳤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梁書』新羅伝에 신라의 위치가 요서의 백제를 중심으로 설명된 것은 백제의 요서영유와 통치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고 하겠다. 백제의 요서영유는 북위 또는 북제와의 접경으로 『北魏書』와 『北齊書』에 언급되어야 마땅한데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지적한 북위와 백제의 교섭만 해도 『南齊書』에서만 언급된 것으로 보면 백제의 요서 영유가 兩書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杜撰이다. 북제의 요서 땅이 北魏時보다 대폭적으로 축소되었음은 그만큼 백제의 요서 영유가 보장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上述한 바와 같이 백제의 遼西 영유가 사실인데도 『三國史記』百濟本紀에 이의 언급이 없고, 다만 『宋書』를 비롯하여『南史』에서만 보이는 것은 南朝와 北朝의 대립관계로 보아 당연하며 백제의 吳越영유에 대한 언급이 『南史』에 없고, 『北史』에서만 언급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한편 고구려의 遼西진출에 대한 언급은 전혀 『南史』에도 없고 『隋書』에서 처음 언급된 것도 같은 의미로 이해되거니와 이는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