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태자시절의 시련과 사택왕후의 견제
III. 친위정변의 단행과 정국 재편
IV. 맺음말
요약
의지왕은 백제 30대 무왕의 장자로 태어난 인물인데, 무왕은 위덕왕과 익산 마룡지 부근에 거주하던 귀족세력의 딸을 부모로 하여 출생하였다. 무왕은 궁궐 밖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부왕이 시해되는 정변 속에서 살아남 올 수 있었다. 무왕은 익산에 머물면서 成家하여 의자 동을 낳았다. 의자왕의 모친은 최근 익산 미륵사지 西塔의 心礎石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봉안기의 銘文에 보이는 沙毛積德의 따님이었던 沙氏王后와는 무관 하였다. 무왕의 왕후로는 『三園遺事』에 보이는 선화공주,사씨왕후 둥이 존재하였다. 그 중에서 의지왕의 생모는 선화공주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녀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익산지역 귀족세력의 所生이었다. 사씨왕후는 『日本書紀』 皇極紀에는 의자왕의 모후로 기록되어 있지만 생모가 아니라 계모였다. 사씨왕후는 의자왕의 태자 시절 최대 정적이었던 豊章 및 翹皮의 生母․祖母였으며, 사택지적과 사택적덕 둥 사비지역에 연고를 둔 강력한 외척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의지왕은 4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632년(무왕 33)에 이르러 태자에 책봉될 정도로 정적이 많았으며, 귀족세력과 근친 왕족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무왕은 다양한 치적을 통해 왕권강화를 이루면서 ‘대왕폐하’를 칭하기도 하였지만, 익산 천도의 실패가 암시하듯이 귀족세력의 견제 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의자 태자 역시 사씨왕후와 강력한 외척을 배경으로 둔 교기의 존재에 큰 위협을 받았다. 의자는 태자 시절에 은인지중하며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는 처신을 하였으며, 무왕이 재위 41년에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의지왕은 정적 제거와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즉위 8개월 만에 친위정변을 단행하였다. 의자왕은 친위정변을 통해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에 제동을 걸었으며, 신진세력을 육성하여 왕권강화의 버팀목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의지왕은 對庸關係의 안정을 통해 新王으로서의 국제적인 위상을 확보하였다. 의자왕은 민생안정과 지방통치 분야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 백성을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의자왕은 국정 안정과 왕권강화를 이룬 후 홈과의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옛 가야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는 쾌거를 올렸다. 또한 의자왕은 고구려와 관계개선을 도모하여 濟․麗和親을 이루었다 백제는 6세기 중엽에 濟羅同盟의 붕괴된 이후 오랜 동안의 고립에서 탈피하여 동맹세력을 갖게 되었다. 의자왕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孝를 태자로 책봉하여 차기 왕위계승분쟁을 둘러싸고 전개될 분란의 소지를 차단하였다. 의자왕은 다방면에 걸친 일대 혁신을 도모하여 오랜 동안에 걸쳐 유지되던 귀족연립체제의 병폐를 일소하였으며, 對新羅戰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