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白村江 전투 이후의 상황에 관한 연구사
2. 율령 도입의 실상
3. 동아시아의 상황과 전후의 일본
요약
663년, 백촌강에서 당의 수군과 마주쳤던 일본의 백제 지원군은 순식간에 바다의 물귀신이 되었고, 그 피로 바다를 물들였다. 이른바 백촌강의 패전이다. 그 후의 일본은 어찌 되었으며, 당과 신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은 백촌강 전투에서 패전했다 해도 본토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당에서 전후처리를 위한 사자가 왔다면 그를 당 황제의 대리로서 정중하게 다루고, 그의 지시에 따를 필요가 있었다. 당은 일본에 당의 율령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동일한 지배체제 아래 기미정책과 책봉정책을 전개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중국에 의한 일본의 제도적 지배가 그 후에도 적극적으로 행해졌는가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까닭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와 관계가 있다.
백촌강 전투 당시 전투의 발단은 수 이래 중국의 동북정책에 있었다. 당의 구상은 통일국가 실현을 위해서 돌궐․고구려를 격파하려는 것이었는데, 고구려가 만만치 않았다. 때마침 백제의 남하정책으로 괴로워하던 신라로부터 구원 요청이 있었고, 이에 응함으로써 신라의 군사력을 고구려전에 이용하려고 했던 당은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고구려, 신라를 쓰러뜨리면 한반도는 모두 판도에 들어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이 일본을 시야에 넣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백촌강 전투에서 승리한 이상 백제 지배와 동시에 일본의 지배 역시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이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신라의 반항이다. 신라와 당의 전투는 뜻밖에도 일본에 평화를 가져왔다. 당은 안동도호부, 웅진도독부 두 곳의 거점을 확보하고, 신라마저 휘하에 둠으로써 멀리 일본까지 원격조정이 가능했다. 그런데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일본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강력한 율령지배와 羈縻支配는 불가능해졌다.
그런데 일본에는 율령과 兵制를 정비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파견되어 있었다. 일본으로서는 그들로부터 지식을 흡수하고, 당 및 신라와도 평화적인 외교를 유지함으로써 미묘한 균형 아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사정을 토대로 일본의 율령제가 정비되어 갔다고 생각할 때, 신라율령의 영향등이 발견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