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齊明朝 친백제노선의 정립
Ⅲ. 백제부흥노선의 두 가지 길
Ⅳ. 친당<百濟>의 등장과 왜국의 대응
Ⅴ. 맺음말
요약
7세기의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대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신라와 당의 대결 등 한반도의 통일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격동 속에서 외교는 곧 국가의 사활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였다. 본고에서는 백제부흥운동과 왜국의 관계를 다루었다. 백제 멸망 후 당으로 압송되었던 태자 부여융은 웅진도독부로 돌아와 같은 백제 왕족인 부여풍장이 지휘하는 백제부흥운동 세력을 괴멸시키는 데 선봉이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부여융의 행동을 반역의 시점이 아니라 이것 또한 백제부흥운동의 한 갈래로서 파악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663년의 주류성-백촌강 전투는 친당 노선의 백제부흥운동과 反唐 노선의 백제부흥운동이 격돌한 아이러니컬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여풍장이 주도한 반당 노선의 백제부흥운동이 종식된 후 당은 곧바로 부여융과 신라의 문무왕 사이에 회맹을 주선하며 친당<백제>의 재건을 도왔다. 그리고 곧바로 과거 백제의 전통적 우방이었던 왜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일시적으로는 친당<백제>에게 백제 부활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왜국은 신라의 적극적인 접근과 당의 왜국 침략 소문 등에 영향을 받으며 적극적으로 친당<백제>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왜국 내부의 사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검토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백제>의 재건을 선전하며 왜국의 지원을 기대하였던 친당<백제>의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신라에 병합되었다. (필자 요약)